500년 조선조 역사에서 반정이 성공한 것은 두 번이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뿐이다. 중종의 경우 정작 본인은 반정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인조는 스스로 반정에 가담,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죄목을 36가지로 열거,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고 민심 수습에 착수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것은 인조와 반정 주체세력인 서인들이 내세운 ‘숭명배금(崇明排金·명나라를 받들고 금나라를 배척)’의 안보정책 때문이었다. 명나라를 섬기는 대신 신흥세력인 대금과 화친을 추진하는 실리외교를 펴 전쟁의 위험을 예방한 광해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컸던 것이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차가운 민심에 크게 당황, 유배 중에 있던 이원익을 민심 수습용 영의정으로 영입했다. 대금 황제 홍타이지는 ‘숭명사대’로 일관하는 인조정권에 대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인조와 서인들은 당연히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보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후금과 싸우느라 제 코가 석 자인 명나라에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전쟁발발 두 달 만에 ‘조선과 대금이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친조약을 맺고 종전됐다.

1636년 병자년 왕후 한씨의 죽음에 문상 온 대금의 맹장 용골대와 마무대는 조선과 대금의 관계를 형제가 아닌 군신관계로 바꾸길 요구했다. ‘숭명사대’의 명분에 갇혀 있던 조선 조정은 대금의 요구에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 인조는 사신의 접견조차 거절하고 명나라를 위해 대금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대금에서 청(淸)으로 국호를 바꾼 청태종 홍타이지는 12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 닷새 만에 개성까지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결국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선언, 병자호란의 치욕을 받아들였다.

지도자의 빗나간 안보의식이 두 호란을 자초했던 것이다.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 못하는 대선 후보의 안보의식만큼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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