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 얽혀 도는 별천지에 앉아 하늘 끝 한가한 구름 바라보네

▲ 학사루. 신라 최치원이 즐겨찾았다고 해서 이름 붙였다.김종직 함양군수시절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학사루는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과 함양초등학교 앞에 있다. 통일신라시대때 천령(함양의 신라시대 지명)태수였던 최치원이 이곳에 올라 자주 시를 읊었다고 한다. 1380년 (우왕6) 왜구의 침략을 받아 불탔고 1692년(숙종18)에 중수했다. 1910께는 함양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뒤뜰에 있다가 1963년부터는 군립도서관이 들어서면서 도서관 뒤뜰로 이용됐다. 1978년 함양초등학교 앞에 있는 현재의 자리에 이건됐다. 본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한다.

‘학사루’라는 정명은 최치원이 신라 헌강왕 당시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저서감 벼슬을 했던 데서 비롯된다. 시독은 유교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이었고 한림학사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비롯한 국서를 작성하는 중책이었다. 헌강왕이 죽자 최치원은 외직으로 나돈다. 그 자신 신라의 6두품제도 아래서 극심한 좌절을 겪었고 그를 견제하는 세력도 엄존하고 있었다. 왕족과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은 그를 주변인으로 내몰았다.

학사루 현판. 신라시대 한림학사를 지낸 최치원은 함양태수
함양에서의 최치원의 흔적은 상림에 그대로 묻어난다. 상림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숲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다. 태산군(태안)과 부성군(서산)태수를 거쳐 천령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함양읍 가운데를 관통하는 위천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다. 그는 읍내를 관통하는 물길을 서남쪽으로 돌려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으로 가꾸었다.나무는 지리산에서 가져와 10리에 걸쳐 심었습니다. 주로 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난 활엽수를 가져와 심었는데 1000년 세월이 지나면서 상림과 하림 중 지금은 상림만 남아 있다. 졸참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 120여 종 2만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1962년에는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됐다. 숲에는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운정(思雲亭)과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侯 崔先生 神道碑)가 있다.

학사루 느티나무에서 본 학사루.
천령태수는 최치원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천재는 6두품제에 날개가 꺾여 평생을 차별 속에서 살아오다 894년 2월 진성여왕에게 신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내용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렸다. 진성여왕은 시무책을 받아들여 그를 ‘아찬’에 제수했지만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진골들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관직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보고 그의 호처럼 ‘외로운 구름 孤雲’ 이 되어 산천을 유람하게 된다.

학사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함양의누정에서 흔히 보이는 활주는 없다. 12개의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내용은 최치원을 기리는 7언시인데 작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7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루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만 깊구나
상하림 긴긴 숲에 성만 높이 솟았고
넓은 들의 동쪽과 남쪽에 두 냇물이 흐르네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행인은 우두커니 흰구름만 바라보누나
가련타 풍물은 예나 이제나 같은데
언제나 건물머리에는 시편만 걸려있네

학사루에서본 함양초등학교. 학사루는 이 학교 뒤뜰에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이건됐다.


학사루 기문은 연암 박지원(1737 - 1805)이 썼다. 그는 김종직 사후 300년 뒤에 함양의 이웃 고을인 안의(현재의 함양군 안의면)현감으로 부임했다가 함양군수 윤광석이 녹봉을 털어 학사루를 중건한 뒤 글을 부탁하자 1794년 ‘함양군학사루기’를 쓴다.“함양은 신라때 천령군이다. 문창후 최치원은 자를 고운이라 하는데 천령태수로 고을을 다스렸다. 누를 설치한 것은 아마 천년이 되었을 것이다. (중략) 아! 고운이 천자의 조정에서 입신했지만 당나라 왕실은 어지러웠고 부모의 나라에 은퇴했지만 신라 조정은 곧 끝나려했다. 천하를 둘러봐도 몸 붙일 곳 없는 것이 마치 하늘 끝 한가한 구름 같았다. 지쳐 머물다 홀로 멀리가 진퇴에 무심했으면 좋았으련만... 바람이 긴 대나무를 쓸쓸히 흔들고 한 마리 학이 쓸쓸한 것에 대해서는 시름겨워 학사가 짙은 가을을 읊는 것이다. 누가 학사라 이름 붙여진 것은 그 유래가 심원하다.”

본래 학사루가 있던 함양초등학교와 함양군청 사이에는 학사루를 마주 볼 수 있는 휴식공원이 있다.
학사루는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장소라는 이야기도 있다. 점필재(?畢齋)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1471년 함양군수였다. 유자광(1439~1512)경상도관찰사였다. 임명직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자치단체장 사이였다. 유자광이 함양에 왔다. 함양에 사는 고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군수가 관찰사를 맞아 인사를 올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김종직은 달랐다. 그는 정몽주 이색 김숙자로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맥을 잇는 영남사림의 영수였다.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순행을 핑계대고 유자광을 만나주지 않았다. 유자광을 피해 간 곳이 이은대(吏隱臺)다. ‘관리가 숨은 대’라는 뜻이다. 김종직은 그 뒤 이곳에 집을 짓고 이은당이라 불렀다.

함양에 온 유자광은 학사루에 올라 주변 경관을 보고 시를 써 누각에 걸었다. 그러나 이 현판은 곧 사라졌다.군수였던 김종직이 ‘고명한 선비들의 글이 걸려 있는 곳에 어찌 유자광 같은 인물의 글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시판을 떼고 불에 태웠던 것이다. 이후도 김종직문하는 유자광을 자주 모욕하고 조롱했다.

500년 된 학사루 느티나무. 함양군수로 재직중이던 김종직이 5살난 아들을 읽고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김종직 사후 6년이 지나 권력의 칼은 유자광의 손에 쥐어졌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은 것이 문제 됐다. 왕은 사초를 볼 수 없다는 관례를 깨고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읽었다.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 세조의 왕권찬탈을 비판하며 세조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고 생각했다. 김종직의 제자이며 이를 사초에 넣은 김일손도 같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피의 굿판이 벌어졌고 이 사건 조사의 최고 책임자는 유자광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죽고 정여창 김굉필 등이 귀양을 갔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함양 초등학교 교정에는 약 500년 정도된 느타나무가 있다. 보통 학사루(學士樓) 느티나무라고 부른다.높이 22.2m, 둘레 7.25m의 크기인데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07호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는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이 5살난 어린 아들이 홍역으로 죽자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아들의 아호가 목아였다. 함양군민들은 지금도 매년 학사루 느티나무 아래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김종직은 1471년부터 1475년까지 5년 동안 함양군수로 일했다. 군수로 와 보니 조정에 공납하는 물품이 함양에서는 나지도 않는 차였다. 배당된 물량을 채우려니 차가 많이 나는 전라도에서 사오는데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겨우 바꿨다. 이러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김종직은 부임초기에는 진상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여기저기 구걸해서 물량을 맞췄다. 그러다가 드디어 관영차밭을 조성하고 차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백성들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 셈이다. 기념비가 휴천명 동호마을에 있다.

현재 학사루에는 조선시대에 쓴 중수기와 시판은 없고 1979년 이건당시 함양군수의 중수기만 남아있다. 그러나 함양문화원이 발간한 ‘함양누정기’에는 연암 박지원의 함양군학사루기‘와 유호인, 노진, 오숙,이방보 신치복,홍우전 등의 제영시가 실려있다.

산수가 얽히어 도는 별천지
이 누에 앉았으니 신선 같구나
마을과 이어진 푸른 대 서늘함이 자리에 스며들고
연기나는 긴 숲에 어두운 그림자 잠겼어라
점필(점필재 김종직)풍류는 백년이 흘러갔고
고운(최치원)이 남긴 흔적 천년이 아득하네
속절없이 인간사를 굽어보고 우르러 보며
난간에 기대 휘파람을 불고 노래하니 소년시절 생각나네
-유호인의 시 ‘학사루’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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