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시인11.jpg
▲ 이상식 시인
봄은 짧다. 금세 간다. 찬기가 여전한 초입과 졸지에 더워진 말미를 제하면, 봄다운 시간은 너무나 빠르다. 봄은 아쉬워서 황홀하다. 청초한 신록과 화려한 만발이 어울린 천상의 풍경화. 두보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진정 시름겹다고 읊었다. 꽃 비로 은유하여 아름다운 낙화로 관조하는 세태와는 다른 시심이다. 여하튼 봄날은 지나간다. 조만간 봄꽃도 스러지리라.

전라북도 사람들은 동북쪽의 산간 지방을 ‘무진장’이라 부른다. 전북의 지붕이라 일컫는 무주·진안·장수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 이 지역은 소백산맥의 줄기에 둘러싸인 고원지대로서 산지로 이뤄진 유사성을 가졌다.

전북에 무진장이 있다면 경북은 비와이시(BYC)가 있다. 봉화·영양·청송의 영문 이니셜로 얻은 명칭. 산간벽지 혹은 두메산골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무진장과 마찬가지로 청량산과 일월산, 그리고 주왕산으로 대표되는 산의 고장이다. 이곳에 발령을 받으면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고 한다. 투박하고 맛깔스러운 인심에 취해서다.

풍부한 광물질 덕분에 일찌감치 철도가 부설된 봉화는 의외로 반촌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엔 ‘삼남의 4대 길지’가 나온다. 경주 양동, 안동 내앞과 하회, 그리고 봉화 유곡을 꼽았다. 한글로 풀이하면 유곡은 닭실마을로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충재 유물각이 볼만하다.

해설자에 의하면 전시된 수많은 보물 중 원본은 ‘시권’ 하나뿐이라고. 충재가 중종 별시 문과 때 제출한 시험 답안지. 과거에 응시한 본인과 가족의 이름이 적힌 오른편 부분은 부정을 방지코자 묶음 철한 흔적이 또렷하다. 영인본이 아닌 진품은 그 자체로 이목을 끄는 매력을 지녔다.

평생 땅을 일군 팔순 농부와 마흔 늙은 소의 우정을 다룬 다큐 영화 ‘워낭소리’.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가 살았던 동네 어귀엔 공원이 조성됐고, 소달구지를 탄 조형물도 세워졌다. ‘워낭산방’이라 새겨진 화강암이 놓인 자택의 철문은 잠겼다. 후손 누군가 그림을 그리는지 운치 있게 꾸몄다.

근래 색다른 주제의 문집이 출간됐다. 박순진의 ‘운산역사기행’이란 서사시집.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애틋한 맘으로 전국을 탐방한 문인의 느낌표다. 개인적으론 이런 종류의 시작에 공감을 갖는다. 역사라는 흔한 소재를 담금질하여 작품을 긷다니 신선하고도 친근하지 않은가.

도내 세 번째로 슬로시티에 지정된 영양은 대시인 조지훈과 국민작가 이문열의 고향. 박순진 시인은 ‘영양 조지훈 생가’란 제하로 주실마을을 노래한다. 두들마을 ‘광산문우’는 적막했다. 담 너머 요요한 한옥의 잔디 마당엔 청동으로 만든 방화수 용기만 덩그렇다. 정치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그의 심정도 그럴까.

상인은 시세에 밝다. 떠돌이로 전전하는 보부상은 한층 그러하다. 역사가는 상업의 영향력에 주목한다.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은 조경 공사가 한창이다. 궁핍에 시달린 그의 ‘객주’는 다년간 자료 수집과 장터 순례를 통한 뚝심의 결정체. 그는 취미가 독특하다. 시골장의 저울추나 펜촉이 달린 철필 수집물도 전시됐다.

남녘에서 북상하는 봄소식은 동북쪽의 비와이시를 시나브로 지나간다. 한결 짙어진 초록을 대하니 봄밤이 그윽이 깊었음을 안다. 문향이 흐르는 향촌의 고샅을 다니며 새봄의 뒤태를 일견한 ‘이가락’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