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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법학박사
우리 시대는 경제전쟁의 전 지구화가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 정치인들은 세계체제의 중요한 변인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또 성찰 과정도 없이 변화만 부르짖는다. 그것도 적폐청산만을. 젊은 피가 결여된 우파는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잘못 도출된 언필칭 합리주의 좌파에 굴복하였다. 오랜 보수의 철학적 진리를 간과하여 몰역사적 교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겨버렸다. 이제 좌파의 깃발 아래 모인 이단아요 반자본주의 선동꾼들이 이 나라를 끌고 가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구체제의 주인이었던 보수는 계승한 전통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더 이상 쉽지 않은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경제성장 고삐를 못 죄면 체제결함으로 귀결된다. 노동규제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만큼이나 끝없는 자본축적에 의존해야 한다. 보수 정치는 조금이라도 기업활동의 규제를 낮추어 지속성장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좌파가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에 가한 비판 중 가장 강력한 하나가 경제적 평등화 프로그램을 내장시켜야 한다는 요구였다. 많은 좌파 정객들의 복지 주장은 그러한 평등화의 수단이었다. 좌파의 정책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결국은 세금 거두어 하겠다는 것 아닌가? 국가가 뭐든지 해주겠다는 복지는 정치적 평등에서 경제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장기적인 해방과정이다. 자국 우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데 영속적 경제성장에 대한 끝없는 기대나 경제개발이라는 근대적 유사종교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라는 좌파의 주장이 모순임을 이번 대선에서 증명해야 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좌파 심(沈)과 문(文)에게서도 고용촉진과 양극화 해소의 탈 악마를 기대할 수 없다. 신선란 안(安)은 냉혹한 현실에서 수권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따뜻한 휴머니스트 유(劉)도 유의미한 지지를 얻기 어렵다. 이제 보수 적자 홍(洪)이 흩어진 보루를 수리해야 한다.

인위적 정계개편이 없다면 아마도 차기는 동거정부가 될 가능성도 있다. 정국 혼란의 적당한 해법을 찾기는 난망이다. 빈곤문제, 양극화, 청년 일자리 등은 보통 복지국가 옹호자들에게는 부(富)의 반대개념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들 관점에서 보면 빈곤과 배제는 경제적 평등개념에 위배되므로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그들이 취한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 부자의 것을 빼앗자는 이념을 이식하지 말고 약자들에게 게임에서 승리할 방법을 가르쳐라.

조야하게 말해서 좌파는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약속하지만 기실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담대한 해결책을 모색하지도 못한다. 좌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수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구태를 동경하고 유지하려는 자’들이고 자신들은 ‘완전한 해방으로 갈 준비가 된 자’로 인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서라. 오랫동안 자신들을 전위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했던 좌파가 이제 케케묵은 구닥다리가 되어 자신들 스스로 적폐가 되었다. 자신들이 경멸했던 앙시앵레짐에 자신들 스스로가 매장되어 버렸다.

좌파는 평등, 공동체, 형제애, 사회정의, 진보, 평화, 행복 이런 가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억압, 착취, 불평등, 전쟁, 불의, 빈곤, 비인간화를 반대한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대 정파를 이처럼 이분법으로 편 갈라 그 틀 속에 상대를 가두어 매도하는 데 너무나 익숙한 자들이다. 역사는 신(神)의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적극적 투쟁과 창조성의 결과라고 좌파는 현혹한다. 마르크스는 미네르바 부엉이에게 미성숙한 날개를 너무 성급하게 달아주었다.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좌파 전위는 대중의 태도와 행위를 비웃으면서도 그들을 좌파의 길로 인도하였다. 좌파는 그 자체가 스스로 역사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가장(假裝)하여 무지한 대중이 눈치채지 못하였다. 좌파의 정신은 항상 그럴싸한 유토피아적 형태를 띤다. 그들은 시민들의 이기주의를 자극해서 서로 싸우게 하여 국가를 파멸시키는 내적 갈등을 조장한다. 그러니 명심하라.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면무도회가 끝나면 좌파는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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