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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사랑과 권력은 인생의 양대 축입니다. 그것 없이는 사는 맛이 안 납니다. 돈과 명예도 그 종착지를 보면 대개는 그것들로 이어집니다. 그만큼 둘 사이에는 친연성(親緣性·친척으로 맺어진 인연)이 강합니다. 실과 바늘처럼 서로 붙어 다니기도 하고 앙앙불락(怏怏不樂·매우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즐거워하지 아니함), 서로를 배척할 때도 있습니다. 젊어서는 사랑이 커 보이기도 하고 늙어서는 권력이 커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권력 아래 모든 것을 복속시키는 인생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런 인생은 말로가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사랑과 권력을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가 있다면 아마 ‘맹목(盲目)’일 것입니다. 사랑과 권력은 항상 ‘눈먼 자’를 만들어냅니다. 사랑에 눈멀거나, 권력에 눈먼 자들이 빚어내는 파란만장, 우여곡절이 안방극장에서 자주 만나는 멜로드라마의 주 소재입니다. 워낙 익숙한 소재여서 멜로를 대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는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전쟁(전투) 영웅, 왕이나 왕자들로도 만족이 안 되면 외계인이나 도깨비까지 캐스팅합니다. 공급자 쪽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최고의 ‘사랑과 권력’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만큼 ‘사랑과 권력’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란 말이겠습니다. ‘사랑과 권력’은 인생의 양념이 아니라 주식(主食)입니다. 그것 없이 사는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흘러간 명화(물론 주관적 판단입니다) 중에서 그 둘 사이의 아이러니를 잘 그려낸 영화가 ‘동방불패’(서극·1990)입니다. 그 흔한 멜로의 정석을 따르지 않고 사랑과 권력의 제로섬 게임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이후부터 무협영화의 쇠락(衰落)이 본격화됩니다. 무협 소재가 줄 수 있는 자극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무협영화가 무예(武藝)가 주는 흥을 최소화하고(비현실적 무예의 등장) 드라마(스토리텔링)와 미장센(영상미)을 극대화한 결과가 결국 무협영화의 퇴장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만큼 사랑의 끝, 권력의 끝을 설득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자본이 세계 영화를 지배하고 있고, 프랑스 영화가 아무리 디테일에 강하다 해도 이 유치한 홍콩 무협영화 한 편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랑만이 줄 수 있는 무한(無限)의 쾌, 그리고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을 거세해야 하는 권력의 본질을 이 만큼 통쾌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불촉(不觸)의 관념 안에서만 존재하고, 최고의 권력은 끝내 자신의 부재(不在)를 부른다는 ‘사랑과 권력’의 아이러니, 그 인생의 속살을 여실히 그려내고 있는 이 영화 ‘동방불패’야말로 가히 동방불패라 할 것입니다.

영화 ‘동방불패’를 보다 보면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습니다. 남주인공 ‘영호충(이연걸)은 과연 동방불패(임청하)의 정체를 몰랐을까?’라는 의문입니다. 영화는 시치미 뚝 떼고 “영호충은 이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왜색풍의 여인이 동방불패라는 것을 종내 몰랐다. 그가 그(그녀)를 알게 되는 것은 최후의 결전이 이루어지는 묘족의 요새에서였다”라고 강변합니다. 그걸 부정하면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막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내 찝찝합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진정 ‘사랑과 권력’에 눈먼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호충이나 동방불패나, 무림의 최고 절정 고수였던 그들이 상대의 정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모른 척했을 뿐입니다. 자기까지 속이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늘 그렇게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는 방법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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