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더불어 민주당 대선 후보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의 삶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인권변호사였던 젊은 시절에도, ‘왕수석’으로 통하던 청와대에서도 노 전 대통령이 옆에 있었다. 문 당선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상주역을 맡아 마지막 곁을 지켰다.

문재인 당선자의 유년시절은 그 시대를 살아간 어느 집안 못지않게 가난했다.

문 당선자의 아버지 문용형 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흥남시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가족들과 남쪽으로 피란해 내려왔고 이들의 가난이 시작됐다.

셋방살이를 전전긍긍하던 이들은 거제도를 거쳐 부산으로 터를 옮겨 잡았다. 부산 남항국민학교를 다니던 문 전 대표는 양동이를 들고 학교 위 ‘신선성당’을 찾아가 배급을 타먹으며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수녀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문 전 대표는 수녀들이 천사같이 보일 정도로 감화가 돼 천주교에 입교하게 됐다.

문 당선자는 당시 명문학교였던 경남중고교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는 문재인’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을 못이겨 방황을 시작해 서울대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1971년 고교 졸업 후 종로학원 진입시험에서 일등해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지만 서울 유학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으로 중도하차 했다. 문 당선자는 당시 경희대학교를 설립한 조영식 박사의 권유를 받고 경희대 법대 4년 장학생으로 수석입학을 하게 됐다.

대학에 진학한 문 당선자는 그 시절을 겪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수감이력도 빼놓지 않았다. 1975년 4월 11일 집회를 주도하다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철창신세를 지게 됐고, 그 해 6월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유신독재와 맞서 시위하다 신체검사도 받지 못하고 군대로 강제 징집됐다. 육군에 입대한 문 전 대표는 특수전사령부 예하 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서 복무해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에게 두 차례 최우수 특전사 표창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대 후 그는 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우다 다시 투옥됐다. 수감 중 감옥 안에서 그는 사법고시 2차와 3차를 통과해 극적으로 석방된 인물로 유명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후보는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다.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며 관행이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끊고 판ㆍ검사 접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술회했다.

6월항쟁이 있던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4월 노무현 변호사는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문 당선자는 부산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당선자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업무적으로’ 다시 결합했다. 당시 노 후보는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깊은 정을 표현했다.

문 당선자는 “노 후보가 당선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영원히 계속됐으면 싶은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문 당선자는 청와대 생활의 시작과 끝을 노 전 대통령과 함께했다. 2번의 민정수석과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이 그것이다.

청와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민정수석을 맡은지 채 1년이 못된 2004년 2월 그는 사퇴했다. 이를 10개나 뽑아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해 4월 총선에 출마하라는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더 컸다.

그는 민정수석 사퇴 후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지만, 현지 영자신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 심판이 기각된 뒤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비서실장을 맡았다.

문재인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지지율 1위를 놓치지 않는 절대 강자로 군림해 당선이 예고됐다.

전 노무현 대통령과의 특수한 관계로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두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