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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28. 조선의 지방 공직자 모델 금계 황준량

한평생 청렴·경세치용으로 백성 돌본 '선비 롤 모델'

황재천 선비인성연구소장 등록일 2017년05월11일 23시19분  
금계 황준량 내외분 묘소(2015년 재단장).
2017년은 금계 황준량의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금계 황준량은 경북 영주의 유명한 고택인 삼판서고택의 세 판서 중 하나인 미균 황유정의 5대손으로 평해 황씨이다.

그의 호 금계(錦溪)는 영주 풍기의 아름다운 계곡인 금선계곡(錦仙溪谷)에서 따왔으며 자(字)는 중거(仲擧)이다. 퇴계 이황과 주고 받은 편지가 퇴계집 중의 한 권분에 해당할 정도로 많다.

금계 황준량은 1517년 태어나 1563년 47세에 타계한 인물로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할 정도로 크게 애통해 하며 행장을 직접 짓고,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만시를 두 번이나 쓰고, 문집의 편차를 직접 정했다.

퇴계 이황은 행장(사람의 일대기 요약)을 쓸 때 매우 엄선하였다. 퇴계 이황이 쓴 행장은 임금 명종, 퇴계의 선친,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금계 황준량 밖에 없다.

금계 황준량은 직접 창건한 영천 백학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안동 분강서원에는 농암 이현보, 파산 류중엄과 함께, 그리고 과거 입격 위주의 소수서원 운영을 비판하면서 그 대척점에 만들어진 풍기 욱양서원에는 퇴계 이황과 함께 배향되어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금계 황준량은 부친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직에 있었다. 그는 특히 목민관의 길을 중시하였다. 중앙의 권력 싸움이 싫기도 하였지만 가장 큰 역점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목민관 이력을 보면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로 세 군데의 목민관 밖에 지내지 않았으나 이는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모친 봉양을 이유로 목민관으로 나선 후 중앙의 요직이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았고 목민관으로 일관하였다.

금계 황준량이 창건한 금양정사.(완공직전에 타계)
금계 황준량의 청렴함은 공직자의 처세에 귀감이 된다. 죽은 후에야 공직에 있으면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있는 재산마저도 학교를 세우거나 주변을 돕는데 썼음을 알고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퇴계 이황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금계 황준량이 죽었을 때 관을 채울 옷가지가 부족할 정도였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였다. 목민관의 자리를 잠시 지나가는 자리로 생각하여 ‘대과(大過)없이 지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백성을 소생시키고 백성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부담을 걱정하여 전임자들까지 쌓여온 무리한 부채문권을 스스로의 절약과 행정의 효율화로 메우고 관련 문건을 소각하였음이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에 전한다.

금계 황준량이 쓴 5천자에 이르는 유명한 단양진폐소에서는 짧은 시간에 단양고을의 현황을 파악하여 단양고을의 소생 방안을 몇 가지 대안으로 제시하여 임금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근거를 명문장으로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 단양진폐소에서는 임금에 대한 비판도 하였다.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모아야 연명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내용으로 이어진 처절하고 고단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 해결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해결 방책을 세 가지로 상책, 중책, 하책의 정책 대안을 제시하였다. 상책으로 10년의 기간 동안 모든 부역과 조공의 면제를 제시하고 그 다음 대안으로 단양군을 없애고 원주에 귀속시켜 아직 살아남은 백성들을 다른 고을로 옮기기를 제안하였다. 이 두 가지 정책대안이 안 되면 꼭 해야 할 대안을 ‘하책(下策)’이란 이름으로 제시하였다. 이 하책에는 구체적으로 10가지 항목을 들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구체적 근거와 원인을 파헤쳐서 보여주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백성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좋은 방책이었다. 목재, 종이, 산짐승, 약재, 꿀 공납(貢納) 등 열 가지의 폐단을 일일이 나열하며 그것을 없애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가 남긴 공직자의 자세인 거관사잠(居官四箴)은 지금에도 공직 수행 기준이 된다.

지기이렴(持己以廉·청렴으로 몸을 지키고)
임민이인(臨民以仁·사랑으로 백성을 대하고)
존심이공(存心以公·마음은 공익에 두고)
이사이근(莅事以勤·일은 부지런해야)


절대자에게 기대어 복을 구하거나 일을 하지 않고 안락(安樂)을 추구하거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세금을 면제받고 군역을 면제받는 것에 반대하였다. 불교의 선종과 교종 혁파를 청하는 상소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는 그런 그의 생각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불교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승려들과의 교유(승려와 수창을 많이 하였다. 여러 산승들을 우호적으로 대우하고 불교의 세계도 선의로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작품에서 보인다)에서 뜻이 통하기도 했음은 주고받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다름의 인정(똘레랑스)’이고 다름의 인정을 넘어 다름의 상호 조화와 공존을 추구했다 하겠다. 서원을 운영할 때 주변의 사찰에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당부도 하였다(소수서원의 운영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황효공, 안현, 안공신, 유경장, 정준 등과 함께 만든 사문입의(斯文立議). 청혁양종소에는 군역(軍役) 등 백성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종교인의 실상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당시 나라를 주물렀던 대왕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잘못은 바로 왕의 잘못임을 지적하는 내용도 들어있으니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비의 기개가 있었다.

금계 황준량의 후손들이 지은 금선정.

금계 황준량이 쓴 상소문 청혁양종소를 보면 “임금의 잘못을 바로 고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우러러보겠습니까? (중략) 대신들은 병을 부지한 채로 점을 치는 방책이나 헌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전하께서도 일찍이 이에 대해 여러 번 올바른 뜻을 표명하시며 반드시 삼가는 태도를 보이셨는데, 결국은 잘못된 길을 밟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십니까? 만약 올바른 도를 믿는 마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올바른 도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제왕의 강학(講學)에 무슨 귀함이 있겠습니까?”라고 임금을 질타하는 말을 과감하게 한 다음 불교의 폐단을 이어서 지적하였다.

“근래에 승려들은 서로 축하하며 선종과 교종은 절대로 혁파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한 어려움에 처하여 저들의 말처럼 되자 저들은 더욱더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팔을 불며 망아지를 탄 채 백주에도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노역을 싫어하는 무리나 사대부 자손이면서도 무식한 자들이 다투어 선종과 교종에의 입문을 영예롭게 여기고 부러워하고, 점차 그 흐름을 좇아 마침내 안락만 추구하고 고된 일은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어른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유행을 따라 숲으로 숨어들고 산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전하의 나라는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종교인의 노역 회피 풍조에 사대부도 물이 들어감을 지적하였다.

금계 황준량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당시 교육은 목민관의 주요 업무이기도 하였다. 학교를 창건하고 기존 학교를 증축하였다. 벼슬을 바라는 교육 프로그램 중심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학문 탐구에 포인트를 두고 사립학교를 창건하였다. 교육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바 일찍 타계하였으면서도 증축한 학교만도 공립 3개 학교 사립 1개 학교였으며 창건한 학교는 사립 4개 학교에 이르니 평생을 학교 하나 만든 사람도 드물었음을 볼 때 그 열정 정도를 알 수 있다.

그가 창건한 학교는 영천의 백학서원, 칠곡의 녹봉정사, 성주의 공곡서당, 영주의 금양정사이며 증축한 학교는 영천의 신령향교, 단양의 단양향교, 성주의 영봉서원(천곡서원으로 후에 개칭), 성주의 성주향교이다.

금계 황준량이 세운 학교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퇴계 이황에 의하면 금계 황준량이 세운 학교에서 수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한다.

금계 황준량이 이건 증축한 단양향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맥을 모두 잇는다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영봉서원(전임자가 창건한 학교로 금계가 부임 후 증수 완공하였으며 후에 천곡서원으로 개칭)과 녹봉정사에서 금계 황준량에게 배웠다.

금계 황준량의 학문을 하는 기본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었다. 학문과 교육과 행정 업무가 상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익히고 경세치용으로 백성들을 위한 유익한 사업을 펼치는 것이 그 본령이라고 보고 실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실천하였다. 학문은 세상에 적용하여 효험이 있어야 하며, 자신을 돌이켜 보며 끝없이 탐구하며 실천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에 적용되지 못하고 실제 써먹지 못한 점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후학들에게 당부한 ‘일상생활에서 내외교수(內外交修)’도 실천에 포인트가 있다.

그의 경세치용 학문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이 된다.

조세이명도지효(措世而明道之效·세상에 적용하여 도를 밝히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반신이궁리지실(反身而窮理之實·자신을 되돌아보고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여 실천해야 한다)


2017년 현재는 혼란의 시대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혼란의 시대는 전환의 시대일 수 있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한 전환의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탄생 5백주년을 맞이한 금계 황준량이 남긴 말, 글, 행동은 전환의 시대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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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천 선비인성연구소장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혼란이 진정 새롭게 거듭나는 해로 만들어야 한다. 각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방안을 찾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서로 돕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선비를 지칭하는 선비 유(儒)는 사람 인人과 공급할 需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공급해준다는 말이다. 선생이 살았을 때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벼슬을 통하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었고 금계선생이 거기에 온 열정을 바치고 생명의 불꽃을 태웠듯이 지금의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 때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 분의 정신을 이을 수 있다. 선현의 뜻을 이음은 바로 그 얼을 우리 시대에 맞게 적용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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