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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세상은 ‘살아남은 자들’의 것입니다. 죽어 없어진 자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제까지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자라도 죽고 나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오늘 죽은 자가 되면 오늘부터 모든 것과의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설혹 아들이, 손자가, 나의 권리와 의무를 상속한다고 해도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성(聖)스러운 폭력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그 모든 남루한 관계들을 한순간에 무효로 돌리는 강력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지상에서의 모든 관계를 접고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입니다.

문학에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되살려 들려주는 기법이 종종 ‘조롱의 제스츄어(비유나 풍자)’를 취하게 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가 됩니다. 죽음으로 단절된 관계의 복원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규칙에 대한 위반이 직설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유나 풍자로서의 ‘죽은 자의 목소리’는 대상된 죽은 자에 대한 조롱이며, 시효가 끝난 구체제에 대한 조롱이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자의 하수인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자들에게 대한 조롱이며, 그런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비겁한 우리 자신에 대한 조롱입니다. 우리나라 작가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나 멕시코 작가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Pedro P?ramo)는 그런 조롱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술적 사실주의입니다. 소설이 망자 자신이나 ‘살아남은 자들’의 입을 빌려 ‘망자의(에 대한) 회고’를 전하는 것은 현실을 조롱할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입니다.

- 자, 이제 자네 모친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아까도 말했지만…….나는 그녀의 초췌한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첫눈에 봐도 무척 어렵고 힘들게 살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눈자위가 움푹 들어간 눈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손가락은 꺼칠꺼칠하고 마디마디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낡은 흰옷은 말이 의상이지 천 조각을 덧댄 넝마나 다를 바 없고, 목에는 성모 마리아 구호소의 메달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메달에는 ‘죄인들의 안식처’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후안 룰포, 정창 옮김, ‘뻬드로 빠라모’)

어머니에 대한 회고로 시작하지만, 소설 ‘뻬드로 빠라모’는 단순한 자서전이나 부모의 전기를 목표한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는 무언가 좀 더 큰 그림을 추구합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들,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죄인들의 안식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무엇을 이야기하든 “소설은 우리 살아남은 자들 전체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국정 교과서 파동이 명시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새 대통령의 업무 지시로 명실공히 ‘죽어 없어진 자’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물론 소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망자의(에 대한) 회고’를 전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조롱의 기법’을 동반합니다. 죽은 자 중 어느 누군가는 억울한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반성의 도구가 되지 않고 그저 ‘죄인들의 안식처’를 조장하는 일에 그칠 때 역사는 퇴행합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많은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가 무엇인지 엄정히 되돌아봐야 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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