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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68. 서울 망원정(望遠亭)

왕들도 반한 옛정취 간데 없고 희뿌연 매연·경적 소리만…

김동완 여행작가 cho@kyongbuk.com 등록일 2017년05월18일 20시46분  
망원정은 효령대군과 월산대군, 두명의 왕의 형이 주인인 정자다.
망원동에서 망원정 찾기가 만만치 않다. 택시기사는 우왕좌왕 헤맸고 동네 주민들은 몇 사람을 만나 물어도 고개를 저었다 .

망원동은 망원정에서 이름을 따왔다지만 정작 망원동에서 망원정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동네를 한참 돌다가 겨우 찾았다. 정면 5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은 단층 짜리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망원동에서 금방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우정터이다. 망우정이 있던 자리는 맞는데 옛날 그 정자는 아니라는 설명이 압축돼 있다. 현재의 망원정은 1987년 서울시가 복원했다. 양화대교 북단,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있다. 정자는 이층 누각으로 돼 있는데 정자 안 처마 밑에는 ‘희우정(喜雨亭)’현판이 걸려 있고 바깥쪽 처마 아래에는 ‘망원정’ 현판이 걸려있다.

망원정 현판은 성종이 그의 형 월산대군이 희우정을 소유하게 되자 이름 지었다.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달리 망우정은 조선 초기 왕들이 노니는 왕실의 휴식처였고 중국 사신의 연회가 열렸던 ‘뼈대있는’ 정자다. 세종이 직접 행차를 한 뒤 이름을 지어줬고 성종도 새로운 이름을 하사했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이 이곳에 들러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연산군은 정자를 확장하려다 중종반정을 맞기도 했다. 스토리가 풍성한 곳이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이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1396~1486)이다. 1424년(세종 6년)지었다. 효령대군은 근처 땅에 농사를 지으며 한강 물결을 바라보며 전원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얕은 언덕 위에서 한강을 굽어보는 경치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명소다.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배를 띄워 선상연회도 열었고 강가로 내려가 시주(詩酒)를 즐기며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망원정의 본래이름은 희우정이다. 세종이 가뭄에 이 정자에 들렀다가 비가 오자 그렇게 이름 지었다.
1425년(세종7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형인 효령대군이 새 정자를 지었다는 소리를 듣고 행차했다. 형을 위해 말과 말안장을 선물하고 가지고 간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비는 하루종일 내렸다고 한다. 가뭄으로 골머리를 앓던 세종의 표정이 밝아졌다. 즉석에서 정자 이름을 지었다. ‘비가 오니 기쁘다’ 희우정(喜雨亭)이라 이름했다. 기쁜 비를 내리게 해 준 정자라는 뜻이고 비를 내려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미를 담았다.효령대군은 당대의 명필 부제학 신장(申墻)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편액을 걸었다. 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변계량에게 기문을 짓게 했다. 변계량의 ‘희우정기’는 ‘동문선’에 실려 있다.

망원정에서 본 양화대교.
“희우정은 사치스럽지도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의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있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자유스러워져서 바람 타고 신선세계에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망원정 외삼문
세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희우정에 들렀는데 세자(문종)와 안평대군을 데리고 며칠을 묵기도 했다. 하루는 안평대군이 밤에 성삼문·임원준·안견 등과 함께 한강가로 내려가 술을 마시며 강에 비친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때 세자가 동정귤을 담아 보내면서 시를 한 수 지어 보냈다.

“단향목은 냄새만 좋고 / 비계는 입맛에 좋으나 / 가장 좋은 것은 동정귤이니 / 향기 좋고 맛도 좋구나”

세자로부터 귤을 받은 일행은 답시를 지어 올리고 함께 있던 안견에게는 이 광경을 그리게 했다. 이걸 하나로 묶어 안평대군이 서문을 지었다. ‘도원몽중도첩’이다. 일본 텐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망원정에서 보는 경관이 뛰어나 왕은 물론 중국 사신의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정자의 두 번째 주인은 성종의 형 풍월정 월산대군(1454~1488)이었다.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월산대군은 성종의 장인 한명회의 농간으로 왕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왕위가 동생에게 넘어가자 산천을 떠돌며 시를 남겼다. 그의 시문과 문장은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다. 월산대군이 희우정을 물려받자 성종이 망원정이라 이름 지었다. 정자에 올라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다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 성종은 자주 정자를 찾아 형과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월산대군이 지은 시 ‘망원정’이 그의 시집인 ‘풍월정집’에 전한다.

망원정 앞 삼월 저물녘에
그대와 봄 옷 잡혀 술을 마련하였네
하늘 가 산이 다한 곳에 빗발은 끝없이 내리고
강 위로 날던 제비는 돌아가지만 사람은 앉아 있구나
사방으로 바라보는 풍경 흥이 절로 나는데
갈매기 해오라기 따라와서 세상일은 함께 잊는다
풍류생활로 마음 편한 것 나의 평생 소원
인간세상 살면서 시비 일랑 배우지 마세나

음력으로 3월이면 아직 춥다. 비가 오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봄옷을 잡혀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풍경에 흥이 절로 난다고 했다. 왕위에서 밀려난 왕의 형이다. 그는 아직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이다. 마음을 비우자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한번 발을 잘못 내디디면 천리 낭떠러지 길이다. 한명회를 비롯한 권신들은 올가미를 놓고 그물 속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망원정에서 한강을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제비를 보며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시를 읽으니 짠하다. 월산대군은 눈 덮힌 양화들판의 경치를 ‘양화답설’이라 이름 붙이고 ‘한성십영’ 중 하나로 꼽았다. 한양의 10가지 아름다운 경치 중에 망우정에서 내려다 보는 눈덮인 양화들판을 랭크 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강희맹 서거정 이승소등 당대의 문장가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 그렇게 살다 35세에 죽었다.

중국사신들이 한양에서 가장 즐겨 찾던 곳이 한강이다. 그들은 제천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다가 망원정에서 내려 술을 마시고 연회를 열어 시문을 주고 받았다.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이라는 사람이 망원정에서 놀고 시를 남겼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해는 기울어 높은 누대에 오르니
좋은 풍광 오래즐기며 웃음소리 끊이지 않네
언덕위의 푸른 버들잎 강 나무와 함께 그늘지고
물가의 안개 가볍게 날아 구름 따라 떠오른다
난간에 의지한들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켜드니 밤놀이 참으로 좋구나
돌아오는 길 도성 불빛이 점점 가까이 보이는데
은빛 달 다정하며 해동 하늘로 올라온다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망원정은 그 후 이름이 또 바뀔 뻔했다. 연산군이 1506년 7월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을 여러 사람이 놀 수 있도록 확장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붕은 초가로 하고 1천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정자 위에서 바라보이는 민가는 모두 철거하고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쳤다. 공사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공사는 중단됐고 망원정은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됐다. 왕과 당대의 문장가들이 노닐던 ‘뼈대 있는’ 정자에 올라보니 옛 정취는 간 곳 없고 소란하다.

정자 바로 아래에는 강변북로에 막혀있다. 한강과 망우정은 강변북로로 단절됐다. 굉장을 내며 달리는 오가는 소음과 경적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다. 멀리 한강이 바라보이기는 하지만 차량이 내뿜는 소음과 매연으로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다.

서거정이 “은꽃이 눈부시고 머리칼 대처럼 빳빳이 서네 / 돌아와 청루에서 술을 사 마시고 / 취하여 매화 옆에서 봄소식을 물어 보내”라고 했던 ‘양화답설’의 정취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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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석 뉴미디어기자

    • 조현석 뉴미디어기자
  • 뉴미디어국장 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등 미디어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010-5811-4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