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용 두마리 끼고 미로 같은 해국길 걷다

나정고운모래해변 노래비
나정 고운 모래 해변에서 4코스를 시작한다. 고운 모래란 수식어에 마음이 끌렸다. (2011년에 ‘나정해수욕장’→‘나정고운모래해변’으로 명칭 변경) 자신을 잘 어필했다 싶다. 밋밋해서 특색이 없는 것보다는 이미지가 분명한 게 기억하기 좋다.

해변 주차장에는 주민들이 푸른 바다를 한 아름 풀어놓고 작업 중이다. 막 건져 올린 미역은 싱싱했다. 손질되어 모양이 잘 갖춰진 미역은 건조대 위에 올려졌다. 잘 마르기 위해서는 햇빛과 바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미역 또한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주차장 바로 앞에는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가 있다. 배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앞면에는 노래 가사가, 뒷면에는 창작 유래에 관한 설명이 있다. 이 노래는 1970년대에 가수 조미미가 불렀고 정귀문 씨가 노래를 지었다. 향토작가인 그는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희망을 수평선에 걸어놓고, 내일을 꿈꾸었다고 한다.

전촌입구 솔밭해변
짭조름한 맛이 가득한 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배는 고픈데 어느 집에 가서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일 때가 있다. 그 고민을 나정항 근처에서 하게 된다면 돌고래가 그려진 횟집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바다를 눈앞에 두고 전복과 해물을 듬뿍 넣은 스페셜 물회 한 그릇을 먹다 보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단 성질 급한 분은 생각해 볼 일이다. 번호표를 뽑고 1층에서 20분 이상 기다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전촌항까지는 1.7㎞이다. 가는 길에 솔밭해변과 오토 캠프장이 있다. 송림 아래에 텐트를 친 중년의 부부가 보인다. 남편이 잡아 온 생선 매운탕이라도 끓이는지 냄비가 뜨거운 김을 뿜어대고 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은 부부의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나이 든 부부가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해국길
다시 해변을 따라 걷는다. 모래 위에는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틈 없이 찍혀 있다. 새로운 발자국이 찍히면서 이전의 발자국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이 위에 찍혔다 사라졌을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발자국뿐만 아니라 강아지와 새 발자국도 있다. 그 위에 발자국 하나 더 얹혔다 사라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때로는 그것에 목숨을 걸고 싶음은 왜일까.

전촌마을에서 제일 먼저 만난 건 허공을 달리는 날렵한 거마상(巨馬像)이다. 생뚱맞게 웬 말(馬)인가 했는데 이곳 마을 뒷산이 커다란 말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 거마상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병마를 훈련 시키고 말을 주둔시킨 곳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진다. 고요하고 아담한 포구에 묶인 작은 어선은 물결에 장단을 맞추고 바다는 봄바람에 익어간다. 세밀하게 손질된 통발과 투망은 바다에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용굴
용굴 가는 길 왼편에는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굵거나 가는 뿌리가 서로의 몸을 휘감은 채 흙 밖으로 코를 내민 채, 안간힘을 다해 수액을 빨고 있다. 뿌리가 무엇인지. 집요해서 처연함마저 느끼며 눈앞의 나무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감포 가는 길은 바다를 낀 작은 능선이다. 가을에는 해국이 천지로 피어 절경을 이룬다고 하니 꼭 다시 와봐야 할 것 같다.

군 경비 지역이던 이곳이 개방된 것은 2015년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970년대에 간첩 6명이 숨어들어 용굴 속에서 지내며 주변을 정찰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일반인에게 알려질 기회가 적었다. 사자를 닮은 ‘사자바위’도 있었는데 군인들이 보초 설 때 시야를 가려 바위 일부를 깨버려 그 형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지점은 아기자기한 오솔길이다. 그 아래로 기암 형태를 띤 용굴이 보인다. 나무 계단을 밟고 아래까지 내려가 보았으나 철망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해변으로 내려가지는 못했다. 호기심 많은 파도만이 동굴 속을 들락날락거리며 하얀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내고 있다.

송대말등대
이 굴에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巳龍)과 맑은 물에 사는 담룡(淡龍)이 함께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태생이 다른 두 마리의 용은 자주 옥신각신 싸웠는데 그 이야기보다는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한 문무왕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방파제에 그려진 용 그림을 보면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떠올렸다. 신문왕은 천신이 된 김유신과 선왕이 내린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피리를 불어 위기를 극복했다고 한다. 경주는 어딜 가나 신라의 기운이 강하게 뻗쳐있다. 신령스러운 두 마리의 용을 생각하며 산과 바다를 깍지 끼고 걷는다. 빠르게 걸으면 약간 숨이 찰 정도의 코스지만 산바람과 강바람을 함께 느끼며 걷기에 이만한 장소도 드물지 싶다. 그뿐인가. 숨차다 싶으면 내리막길이 나타나고 나무 계단이 단조롭다 싶으면 다시 흙길로 이어진다.

감포항
어느 순간 오솔길이 끝나면서 눈앞이 환해진다. 탁 트인 느낌이 지나치게 강해 썰렁한 느낌을 받는 순간, 멀리 감포항이 보인다. 초소로 사용되었던 건물 잔해가 해안가 곳곳에 남아 있어 군사지역이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겠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둥그스름한 감포 해변이 품을 활짝 벌리고 있다. 잘그락 잘그락 몽돌을 밟으며 걷는다. 오늘 이곳 바다는 수줍음 많은 아가씨 같다. 그 위에 잠시 앉아 본다. 크기와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대부분 둥글다. 점점이 떠 있는 작은 바위도 하나같이 둥근 원이다. 버섯 같고 초가지붕 같다. 모서리가 없어 참 편하다.

잠깐의 휴식 뒤 해안 마을길을 걸었다. 등 굽은 소나무가 담장 너머로 집안을 살피는 벽돌집을 지나자 이번엔 난로 연통이 담장을 넘어와 골목을 굽어보고 있는 집이 나온다. 앞집이 옆집을, 뒷집이 앞집을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것 같다. 길목마다 생선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가자미와 도루묵을 널고 있는 주민들 모습도 보인다. 널고 뒤집느라 허리를 펴지 못한다. 굽은 등에게 말을 거는 게 미안해서 몇 번을 망설이다 그만둔다.

해국계단
해변을 향해 처진 빨랫줄이 오늘은 한가하다. 빨랫감 대신 동해 바다라도 물고 싶은 걸까. 그 아래 누렁이는 지나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나른한 눈을 끔벅인다. 마을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감포항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항에는 대형 선박이 빽빽이 정박해 있다. 출항 준비를 끝낸 어선은 먼 바다로 나가기 위해 워밍업을 하고 있고, 식당가에는 게를 삶는 솥이 허연 수증기를 뿜어낸다. 방수 앞치마 차림에 장화 신은 남자가 먹고 가라며 손님을 부른다.

호객행위가 부담스럽다면 육 거리 모퉁이 송도 횟집은 어떨까.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붙잡지 않는 40년 전통 맛집이다. 지붕도 낮고 간판도 낡았고 홀도 비좁다. 그런데 맛있다. 할머니와 아들 부부가 장사를 하는데 젊은 부부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지 않지만 여행객의 입맛을 살필 줄 안다. 감포항 주변은 어느 곳이든 싱싱한 해산물과 갓 잡아 팔딱팔딱 뛰는 횟감으로 풍성하다.

감포항 해산물 대게 찜

해국 길을 보고 싶어 감포 공설시장과 수산물 상회 건물 사잇길로 접어들었다. 감포항을 중심으로 해안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1920년대에 개항된 후 일본인들이 이주해 살던 마을이라 일본식 가옥이 많다. 미로 같은 골목에 보라색과 하얀색 해국이 활짝 피었다. 미로 같은 꽃길이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국 골목→해국 계단→옛 건물 지하 창고→다물은집→한천탕→우물샘→소나무집) 순으로 걸으면 된다. 총 거리가 600m 정도라 천천히 둘러봐도 30여 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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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수진 소설가
□여행자를 위한 팁
△거리: 나정고운모래해변 →송대말 등대( 4.7㎞)
아담하고 소박한 어촌이 이어지고 완만한 코스라 누구나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다.
△대중교통: 나정 버스정류장 → 전촌 삼거리 (130번 좌석), 전촌삼거리 정류장 →감포가나안수퍼 (100. 100-1)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수진 작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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