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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일이 가장 어렵다.” 제가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막상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면(자판을 두드리면) 그동안 무성했던 이야깃거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늘 경험합니다. 그와 함께 또 하나 잊지 않고 다짐하는 게 있습니다. “책 보고 오버하지 말라.” 역시 수십 년 동안 교편을 잡아오는 중에 절로 터득한 계명(誡命)입니다. 책은 많은 사람이 돌려보는 겁니다. 그 안에 어떤 진실이 있더라도 그것은 나만 아는 게 아닙니다. 모두 다 아는 것을 책 한 권 보고 나만 아는 것처럼 떠드는 것은 참으로 우매, 우둔한 일입니다. 더욱이 아직은 잘 ‘모르는’ 학생(대중)들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거의 사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스스로 인문학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만약 그 ‘손으로 내려오지 않은’ 지식 나부랭이들을 팔아서 ‘코 묻은’ 돈을 앗는다면 그것은 거의 강도짓이나 다름없는 일일 겁니다. 적어도 그 영역에서는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일’의 중(重)함을 간과케 하는 것만큼 악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계명을 최근에 연속적으로 듣는 일이 생겼습니다. 한 번은 제가 평생 취미로 삼고 있는 검도의 사범 연수회 때의 일입니다. 저보다 젊은 강사가 “책 보고 오버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늙은 연수생들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무도(武道)는 오직 몸을 통해 전수될 뿐 관념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였습니다. 아마 본인도 ‘선생님’한테 평소에 자주 듣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집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저와 한평생을 같이 살면서 끝까지(?) 책을 천적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덕분에 얼마 전에 먼지 유발자 노릇밖에 하지 않는 오래된 책들을 집 밖으로 대량 방출했습니다.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와야 한다”라는 말은 요리사인 친척에게 들었습니다. 외국에 이민 가 있는 분인데 두어 달 고국 방문차 저희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것저것 요리에 대해 물어보자 말로만 떠들지 말고 직접 부엌으로 들어가 물에 손을 담그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거였습니다. 요리는 손으로 하는 것이지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물과 불과 칼과 도마와 온갖 식재료들이 내 손을 타고(乘) 어우러지는 게 요리지 내 식탐과 호사 취미가 그냥 요리되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떤 영역에서든 ‘몸(실천)’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누워서 생각으로 소설을 한 권씩 써내려가고, 누워서 생각으로 산해진미를 한 상씩 차려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작으나 크나 내 손으로 만든 알찬 소출만이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문득 턱없는 반발심이 들기도 합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함)도 결국은 “책 보고 오버하지 말라”를 그 극단에서 강요한 처사였습니다. 의도야 어떻든 분서갱유는 역사적으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 낙인이 찍혀있는 사건입니다. 결국, 그렇게 극단적인 실천궁행(實踐躬行)만 중시하다가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발상을 해봅니다. ‘손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들’이나 ‘책 보고 오버하는 것들’도 어느 수준까지는 통 크게 용납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깡그리 소탕하고 나면 정작 ‘사람 사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엉터리 짓들을 하다가 보면 개중에서, 연꽃은 아닐지라도, 쓰레기통에서 피는 장미꽃 몇 송이는 나오지 않겠습니까? 인류사 자체가 그렇게 진행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책 보고 오버하지 말라”,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게 어렵다”, 이 두 마디 말을 전하는데 왜 이리 장황한 말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게 어렵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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