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한 변호사.jpg
▲ 강정한 변호사
어느 해 이른 봄, 파리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나눠주었다. ‘다가오는 4월 1일부로 모든 학생이 지정된 교복을 반드시 착용하여야 한다’는 지침이었다. 혈기왕성한 파리의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방침에 곧바로 반발하여 학교 담벼락에 교복 착용 반대 등의 글귀를 쓰는 등 적극적인 단체행동까지 하고 나섰다. 그런데 정작 학부모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내문을 받고서 아이의 교복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한국 출신의 어느 학모(學母)가 이웃 주민들에게 이 문제 대한 조언을 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안내문은 학교 당국의 ‘만우절 이벤트’였을 뿐이었다. 교복 착용 시행 예정일로 ‘4월 1일’이 기재되어 있는 것만 보고서도 프랑스 부모들은 단번에 이를 알아챘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담벼락에 저항 문구를 써 붙이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학교나 선생님이나 부모 누구도 학생들에게 그것이 만우절 농담이었음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작가 목수정은 ‘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이라는 책에서 여러 글모음 가운데 하나로 위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나 교육 당국이나 국가 중 누구도 아이들에게 교복을 강제로 입힐 리 없다는 프랑스 학부모들의 믿음이 굳건하였기 때문에 위 안내문이 그저 ‘농담’이라는 것을 그들은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당국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학생들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어른들은 오히려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교육부가 이런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였듯이 여러 지역교육청의 교육감들도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 교과서를 받아들일 것이 예상되었다. 2016년 10월 24일의 태블릿PC 보도로 시작된 시민 혁명이 없었다면 국정역사교과서라는 시대착오적인 물건이 지금쯤 전국 학교에 배포되어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참으로 아찔하다. 자유를 지킨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채식주의자’로 맨 부커상(賞)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열흘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에는 지금까지 출판된 5·18 관련 기존 소설들 모두를 뛰어넘는 벅찬 감동이 있다. 눈물 없이 이 소설을 다 읽어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바로 이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그렇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우리 국민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소년이 온다’는 ‘채식주의자’를 제치고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소설 주인공인 어린 ‘동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와 역사를 전혀 새롭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가 백 명의 회고록이나 자서전보다 젊은 한 작가의 열성적인 취재를 통해 탄생한 위 소설 한 권으로 우리는 더 감동적으로 역사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소설과 소설가를 두려워한 것은 어쩌면 불의(不義)한 지난 권력의 당연한 속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변호인은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국가보조금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술 활동을 침해하고 예술인이 활동을 못 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변론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이번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의 대통령의 감동적인 유족 위로 장면을 보고서도 “북한군 개입 의혹 부분까지 함께 밝혀져야 한다.”라고 논평했다.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다. 자유를 지키는 시민의 힘을 다시 보여 줄 수 있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3년 가까이나 남은 것이 참으로 원통할 뿐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