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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한 변호사
대학 신입생 시절이던 1986년, 토론 모임 가입 절차의 하나로 쓴 영어 스피치의 제목은 ‘From 1945 to 1986’이었다. 그 무렵 반민특위 해체 과정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된 내용은 해방(1945) 이후 당시(1986)까지 존속되고 있던 민족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의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6월 항쟁(6·10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렇게 ‘1987-2017’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다. 들끓던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이 4·13 호헌조치 이후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뽑기로 한 날이 바로 1987년 6월 10일이었다. 서울 시청 앞에 모였다가 경찰에 쫓겨 시청 남쪽의 빌딩들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간신히 피신한 일, 이후 다시 충정로 방향으로 진출하다가 사과탄 세례를 받으며 문 열린 민가에 불쑥 들어 가 마루에 앉아 계시던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꾸벅 한 후에 황급히 펌프 물로 사과탄가루를 씻어내던 일이 눈앞에 선하다. 그 후로도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민정당은 이른바 6·29 선언을 내놓았다. 민정당의 대통령직선제 수용은, 실은 이른바 ‘양김(兩金) 동시 출마 시 민정당 필승론’이라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고 평가도 있지만, 그 당시로써는 커다란 국민적 승리로 여겨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두 이미 알고 있다시피 그해 겨울은 차디찬 겨울이 되고 말았다. 선거 후, 피맛길 선술집에서, 명동성당 언덕 술집 골방에서 울음을 삼켰던 기억도 선명하다. 6월 항쟁의 결과가 엉뚱하게도 군사정권의 연장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캠퍼스 구석구석에 패배주의가 만연하였다. 이듬해 봄, 국민은 다시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국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인들은 이른바 ‘3당 합당’이라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 12·12 군사반란과 5·18 학살 책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국민은 일시 환호하였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사면을 받았다. 재벌 중심의 성장은 가속화되었지만, 그 끝자리에는 IMF 위기가 있었고 선량한 국민의 행복한 가정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국민 화합을 위하여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시킨 위대한 대통령 김대중은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지만, 일개 검사마저도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결국 유신정권과 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3당 합당으로 이어져 온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MB 정권 초기에 참을 수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4대강은 썩어가고 통일은 멀어졌다. 이후 만주군 장교의 딸이 일제에서 해방된 조국의 ‘직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임기 중 그가 탄핵이 되어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는 역사가 진행 중이다.

지난가을, 겨울을 거쳐 온 국민의 촛불의 힘으로 만들어 낸 문재인 정권의 정부 구성을 위한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다. 외교·안보를 포함한 국정 전반의 7개월 이상의 공백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전 여당 소속 의원들이 무책임한 딴지를 계속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6월 항쟁 30년째인 2017년은 이제 20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드라마 ‘시그널’의 주인공 이재한 형사가 남긴 유명한 대사는 “20년 후에도 거긴 그럽니까? 뭔가 바뀌었겠지요.”였다. 솔직히 우리는 이제껏 “그렇다, 달라졌다.”고 확실하게 답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우리들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부디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큰소리로 답하고 싶다, “예! 여기는 이제 안 그럽니다. 그래도 한 30년(1987-2017) 지나니까, 달라져야 할 것들은 많이 달라지네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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