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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법학박사
문재인 정부의 경제철학은 케인스의 이론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규제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헌법이 경제에 대해서 통상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 규제 완화가 중요한 정책과제로 되어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갈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우리 헌법은 경제 질서에 관해서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원리로서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 제한적 규제는 원칙적으로 위헌이다. 사회적 약자는 경쟁제한으로 구제할 것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은 허용하되 경쟁에서 패한 자는 사회보장 등에 의하여 구제해야 한다. 양극화 해소니 비정규직의 철폐니 이런 개혁이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인위적 정책은 후유증의 골을 깊게 남길 뿐이다. 칼 마르크스는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니 시장을 신뢰해야 한다.

자유는 어디까지나 전(前) 국가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유권을 국가에 선행하는 전 국가적 권리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 자유의 실정법화로 이해해 왔다. 이것은 오해이고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자유권의 목록에는 국가의 성립과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자유인 갖가지 것들이 인간이 향수할 권리의 대상으로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도 국가 이전에 주어진 자연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홉스적 의미에서 국가는 자연상태의 극복을 목표로 한다.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대해 압력장치로만 존재해야지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되어 시장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헌법이 국가의 책무로서 예정한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실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니 공짜 밥을 준다거나 세금으로 일자리 만들겠다는 발상이 등장한다.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실체적 정의인지는 국가가 근거로 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시대마다 달라진다. 19세기를 통틀어 정의의 내용은 법치국가를 통한 예측 가능성 및 그 수정원리로서 자유의사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입법이었다. 근대 입헌주의 국가는 자본주의 전개와 함께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국가의 편에서 바라보며 경제적 자유를 정의로 본 후 국가가 그 옹호자를 자처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20세기 이후 사회국가(social state) 아래에서는 경제적 자유권의 사회적 구속이라는 배분적 형평이 정의를 대체했다.

작금의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 글로벌 이코노미의 게임을 멈추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수가 되는 일도 아니다. 공정한 게임이 지속하도록 각각의 부정합 상태의 제멋대로인 법 규범을 국제표준에 맞추는 것이다. 더 나아가 외상값 떼먹는 일이 없도록 선의의 플레이어에게 융자하는 정도의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 국가로부터 독립한 자유주의 경제는 테러나 전쟁 같은 국가 그 자체의 위기 때에는 그 존재 자체가 완충재로 기능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헌법상의 경제적 자유의 보장은 경제 질서에 헌법 외적인 국가개입의 원칙적 금지를 뜻한다. 경제민주화라는 미명으로 부당한 국가개입은 자제해야 한다. 물론 누구나 허공에 제도를 만들 수는 없다. ‘꽃이 붉다’는 명제는 붉다는 관념이 자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법체계 내재적인 모순이 비합리적인 정쟁(政爭)의 결과라면 그와 같은 법 규범의 시정을 위한 헌재의 판단이 필요하다. 글로벌 경제는 인위적 국경과 제도로 제약된 상황에서 사람, 물건, 돈의 자유로운 이동의 결과이다. 동시에 기술개발의 실패와 자원의 고갈, 기후변화나 테러처럼 증가하는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국가권력이 어쩔 수 없이 개입하여 위험을 헷지(hedge)하는 것에 불과하다. 경제는 자유라는 먹이를 먹고 자란다. 문재인 정부에서 기업의 자유권이 만개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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