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궁원 식물원에 가면 여러 가지 열대 식물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널찍한 잎이 시원스럽게 뻗어 올라간 데다 타래 진 열매까지 달린 바나나 나무가 인기다. 식물원을 찾은 사람들은 으레 싱싱한 이파리의 너울거리는 손짓에 이끌려 바나나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나나를 정원에 심으면 파초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궁원의 강정만 식물관리팀장은 바나나와 파초는 과는 같지만 종이 다르다고 한다. 바나나는 날씨가 더우면 간혹 가정집에 심어 놓은 것에도 열매가 달리지만 파초는 퇴화 돼서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나나는 나무라고 하지만 엄밀히는 파초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파초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곳곳에서 길러졌다.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면 뿌리가 얼어 죽기 때문에 가을에 뿌리를 파서 토굴 속에 묻어 두었다가 봄에 뿌리를 꺼내 정원에 내다 심었다.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파초를 특별히 좋아해서 파초 기르기가 취미였다. 청명 한식에 심어 두면 하지의 더위가 찾아 왔을 때 "이내 남국(南國)의 파초는 너울너울 푸른 잎을 청풍(淸風)에 흩날리매 내 세상이라구 너울거린다"고 했다. 

파초를 즐긴 문인화가들이 많았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파초의 잎은 여름철 더위를 잊게 할 정도로 청량감을 준다.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후두둑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넓은 이파리에 비 듯는 소리 또한 어떤 악기 연주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경에서 천지의 조화가 오묘한 것을 표현해서 연비어약(鳶飛魚躍·솔개는 하늘 위를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이라 했지만 파초잎에 비 뿌리는 소리 또한 오묘한 어울림의 극치다.

정조의 파초도는 보물로 지정돼 있고, 김홍도, 정선, 강세황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도 파초를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14일 대구 효목동 한 음식점 마당에 바나나가 달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5일에는 경북 포항의 한 교회의 화단, 광주 북구의 한 가정집 마당에 파초 대신 심어놓은 바나나에서도 열매가 달렸다는 소식이다. 지구 온난화로 아열대 식물들이 한반도에서 열매가 달리는 것인데 열매만 보지 말고 덤으로 파초의 청량함을 느껴보면 좋을 것이다. 
이동욱 편집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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