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불로 불린 선승 누운 자리 '강 구경 달구경 극락이로세'
봉미산은 해발 856m로 용문산(1,157m)의 북쪽 능선과도 이어져 있다. 말 그대로 봉황의 꼬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봉황의 꼬리 끝에 신륵사가 있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여강을 굽어보고 있다. 절 안에는 조선시대 조포나루터 기념비가 있다. 강과 맞붙어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경승이었다. 조선초 문인인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앍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말했다. 서거정은 ‘여주팔영’에서 ‘벽사(甓寺)’로 소개하고 있다. 신륵사에는 벽돌로 만든 다층석탑이 있는 데 그래서 벽사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의 원찰로 삼았기 때문에 ‘보은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오솔길은 강가를 따라서 났는데 一徑緣江湍
내가 예전에 벽사를 찾아가 보니 我昔訪甓寺
지경이 깨끗해 속세 같지 않았네 界淨非人間
보제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는데 燒香普濟眞
오랜 세월에 구름은 장 한가롭구나 歲月雲長閑
백련사를 결성하기도 전에 未結白蓮社
먼저 영취산에 당도하였네 先到靈鷲山
우리 이 목은 노인이 생각난다 懷我李牧老
옛 비갈에 이끼가 얼룩졌구려 古碣苔斑斑
- 서거정의 ‘여강팔영’ 중 ‘벽사’
밤에 홀로 동대 탑에 올라 獨夜東臺塔
오사모 쓰고 멀리보며 서 있노라니 烏紗立逈然
무심한 소나무에 바람이 속삭이듯 불고 松虛風淅淅
강이 고요하여 달빛 유난히 밝네 江靜月娟娟
남은 길 무슨 별수 있다던가 末路無長策
뜬 인생 이미 늘그막인걸 浮生已晩年
조각배 여기 댄 것은 扁舟有歇泊
구름 연기 좋아서가 아니라네 不是愛雲煙
- 정약용의 시 ‘밤에 배를 대고 동대에 올라’
나옹과 이색은 원나라 유학을 다녀오는가 하면 공민왕과의 돈독한 친분을 가지며 고려시대의 엘리트로 촉망 받았으나 생전에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이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이색은 나옹을 찾지 않았다. 입적했을 때도 왕명에 따라 사리석종기를 썼을 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랐던 것이다. 불가와 유가는 확연히 다른 길이었다.
나옹은 우왕과 집권세력의 견제로 먼 길을 떠나다 병을 얻어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옹의 사리석종기를 쓴 이색은 강월헌에서 멀지 않은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옹이 죽은 지 20년 뒤이다. 태어난 곳도 영덕이고 죽은 곳도 여주 여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