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술 오천고교사.png
▲ 황인술 오천고 교사
오천읍 지역은 삼한시대 진한 12국 중 근기국(勤耆國)의 영역이었으나 신라에 편입된 후 근오지현이 되었다. 근오지현을 일명 오량우현(烏良友縣) 또는 오천(烏川)이라 불렀다. 오천은 해와 해맞이를 상징하는 지명으로 설화에 등장하는 제천지인 도기야(都祈野·해돋이 들)와 영일(迎日·해맞이)은 음과 훈이 연관된 지명으로 포항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오천은 불교와 유교문화가 공존하는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살아있는 지역으로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자랐던 마을인 문충리가 있다. 세종 때 포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마을 지명을 문충동, 본가가 위치한 골짜기를 문충골이라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문충이란 마을 명은 정몽주의 시호 문충(文忠)에서 따온 것이다.

고려말 충신으로 포항시 인물 2호로 지정된 포은 선생은 충절의 상징으로 그의 고향 문충리에는 여러 사람의 답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현재 문충리 생가터에는 승마석과 나무 표지판 하나만 외로이 있을 뿐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포은은 오천이 고향이므로 호를 따로 ‘오천(烏川)’이라고도 하였으며 지주사(知奏事) 때부터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중간에 영천으로 이주하였다. 포은 선생이 유년기를 보낸 오천 문충리에는 100여 년 전부터 “자고로 유명한 우리 문충동, 정포은 나신 곳이, 이곳이 로다. 산수도 가려 하고 인심 좋으나, 아이들 교육 없어 유감이로다” 라는 문충 동가(洞歌)가 마을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와 포은의 숨결을 이어오고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영일이 본향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신이 직접 쓴 저성역야우(諸城驛夜雨)라는 시에서도 오천이 고향이라고 하였다. 오천서원의 배향인물인 형양 정습명과 포은 정몽주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가 지향하는 시대적 가치가 무엇인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사 지킴이로서 포은의 시대의식을 계승하려는 주민들이 포은 ‘정몽주 선생 고향 집터 복원’을 위한 자발적인 모금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민간의 작은 모금활동으로 고향 집터를 마련하고 포항시의 지원과 함께 포은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고 포은 전시관이 조속히 건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포은의 고향 문충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포은의 충절을 알리기 위해 지역민들은 역사의식과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또한 후손들에 심신 수양을 위한 문화체험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간절함이 문충리 주민과 ‘포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시작한 작은 주민공동회가 지역 문화발전에 동력이 되기를 확신해 본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우리 고장의 역사이며 올곧은 숨결로 살아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지역사회는 긍지를 가진 지역민과 연대하여 향토사나 향토문화의 발굴·계승·보존을 위한 ‘향토문화공동체’을 결성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인 포은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내어 우리 고장 정신문화의 표상인 포은의 충절과 기개를 계승 발전시켜야 해양도시 포항의 인문학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