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눈물 보태며 끝끝내 지킨 절개 평창강 절벽에 우뚝
제천에서 관란정으로 가는 길은 일반적으로 정자를 찾아가는 길보다 힘이 든다. 정자가 나지막한 산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관란정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산꼭대기를 보여주고 산을 내려가려는 사람에게는 낭떠러지를 드러낸다. 강에서 산을 오르려는 사람 입장에서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정자에서는 평창을 거쳐 영월로 흘러드는 서강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자에서 나와 보면 한반도지형인 영월군 한반도면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자 옆에는 관란(觀瀾) 원호(元昊, 1396~1463)의 유허비와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환란을 만나더라도 평소 모습대로 행동하며 반듯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안다. 죽어야 할 때 죽는다면 마음은 편안하고 덕도 온전해지는 법, 세상에서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고 한다. 형세 상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땅의 형편상 꼭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고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나의 인간 됨됨이를 훼손하지 않지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삶과 죽음이 비록 길이 달라도 끝내 가는 길이 같다. 요컨대 의리가 있는 곳을 살펴서 올바르게 살거나 죽어야 한다” 비문은 죽지 않고 살아 끝까지 의리를 지킨 원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갈대꽃 단풍잎엔 찬 바람 불어오네
알겠노라 여기는 장사 땀 언덕인데
임의 혼령이 어디 갔나 달빛만 밝게 비치네”
단종이 죽자 그는 영월 수주면 무릉리 백덕산 아래 토실에서 3년 상을 치른 뒤 그리고 고향 원주로 돌아와 은거하며 산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손자 원숙강(元叔康, ?~1469)이 민수사옥에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원숙강은 ‘세조실록’ 편찬 당시 사초에 작성자의 이름을 쓰게 되면 사초작성의 공정함을 기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신들의 보복이 두려워 비위관계 기록을 몰래 수정하였다가 장살 당했다. 원호는 이때 자신이 쓴 글과 상소문 등을 모두 불태우고 후손들이 벼슬을 하지 말도록 했다.
원호가 죽은 뒤 90년쯤 지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관란정을 찾았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가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능지처참당했고 정여창은 귀양을 그의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18세의 피 끓는 청년 김일손은 원호의 ‘탄세사’에 답하는 시를 썼다.
솟아오른 산은 푸르고 푸르러라 起之山兮蒼蒼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소리 鵑哭兮一聲
이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놓네 愁人兮斷腸
서리가 대지를 덮으니 울창한 숲 빛깔이 변하고 霜滿地兮喬林變色
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훤한 햇빛이 없어지네 雲遮天兮白日無光
풍채가 장대한 사람이 若有人兮頎然
양지 바른 산에 홀로 서 있구나 表獨立兮山之陽
당신은 이제 떠나 목숨을 버려도 후회하지 않으리 此君一去沒身而不悔兮
아아 나 또한 따르려고 하며 기웃거리네 我欲從之而徜佯
정조에 이르러 후손 원경적이 원호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1784년 왕이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청렴결백하고 절의를 지키는 일은 정(貞)이라 하고 정직하고 사악함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고 했다. 원호의 선비정신을 높이고 기림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관란정에서 문득 떠오르는 고사가 있다. 존이감당거이익영 (存以甘棠去而益詠)이다. ‘팥배나무를 그대로 남겨두라 떠나갔지만 더욱 기려 읊어라’라는 뜻이다. 천자문에 나온다. 출전은 ‘시경’ ‘감당’편이다. 주나라 소공 석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팥배나무 아래 머물며 백성들 아픈 곳을 잘 어루만져 주었다. 백성들은 팥배나무를 보존하여 기념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선정을 찬미하여 시로 읊었다. 원호의 충의 절개가 관란정 정자로 평창강 절벽에 우뚝 서 기려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난 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