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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73. 제천 관란정(觀瀾亭)

강물에 눈물 보태며 끝끝내 지킨 절개 평창강 절벽에 우뚝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6월22일 17시50분  
▲ 관란정은 생육신이 관란 원호의 충절을 기려 세운 정자다. 원호는 이곳에서 단종이 유배살이를 하는 영월을 바라보며 눈물로 시를 쓰며 단종의 복위를 소망했다.
관란정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평창강 절벽 위에 있다. 제천에서는 평창강을 서강이라 부르고 절벽 일대를 사내평이라고 한다. 관란정이 있는 절벽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선암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한반도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반도 지형을 높은 곳에서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영월 말고도 더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제천시는 시내 곳곳에 한반도지형 이정표를 붙여 놓고 관광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반도 지형을 놓고 영월과 제천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제천에서 관란정으로 가는 길은 일반적으로 정자를 찾아가는 길보다 힘이 든다. 정자가 나지막한 산의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관란정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산꼭대기를 보여주고 산을 내려가려는 사람에게는 낭떠러지를 드러낸다. 강에서 산을 오르려는 사람 입장에서 절벽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정자에서는 평창을 거쳐 영월로 흘러드는 서강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자에서 나와 보면 한반도지형인 영월군 한반도면이 발아래 펼쳐진다. 정자 옆에는 관란(觀瀾) 원호(元昊, 1396~1463)의 유허비와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관란정은 생육신인 관란 원호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관란정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호를 따 후학들이 1845년(헌종 11)에 세운 정자다.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좌향은 앞뒤 정면을 피해 동향으로 했으며 현판은 정자 가운데에 걸지 않고 측면 2칸 중 북쪽 칸에 치우치게 걸었다. 1941년에 개축하였다가 1970년과 1987년에 다시 고쳤다. 정자를 세우면서 유허비(遺墟碑)도 함께 세웠는데 유허비는 영·정조 때 대학자인 이계(李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세웠다. 일반적인 비문과 달리 붉은색 글씨로 새겨있는 점이 특징이다.

“환란을 만나더라도 평소 모습대로 행동하며 반듯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안다. 죽어야 할 때 죽는다면 마음은 편안하고 덕도 온전해지는 법, 세상에서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고 한다. 형세 상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땅의 형편상 꼭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고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나의 인간 됨됨이를 훼손하지 않지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삶과 죽음이 비록 길이 달라도 끝내 가는 길이 같다. 요컨대 의리가 있는 곳을 살펴서 올바르게 살거나 죽어야 한다” 비문은 죽지 않고 살아 끝까지 의리를 지킨 원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관란정 앞에 있는 탄세사 시비.
‘관란’은 ‘맹자’의 ‘진심장구 상’편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必觀其瀾)’에서 따왔다. 물을 바라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치는 지점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경북 경산시에는 ‘관란서원(觀瀾書院)’이 있다. 조선 중기 이승증(李承曾)의 시문집이 ‘관란문집(觀瀾文集)’이고, 조선 후기 고회(高晦)의 문집이 ‘관란재유고(觀瀾齋遺稿)’이다.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이름은 제천 말고도 여럿 있다. 옛 어른들은 물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 고요하게 흐르는 물결이 언제 파란을 일으킬지를 걱정했으며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다가온 파란만장을 짐작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물결을 보며 명철보신을 마음에 담았고 다른 이는 격동의 세파 속에 자신을 던져 정의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원호의 경우 ‘관란’은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불의의 세력 앞에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기준이었을 것이다. 원호는 세조가 내린 호조참의 벼슬을 거부했다.

정조때 대학자 홍양호가 세운 원호 유허비.
관란정이 있는 자리는 원호가 초막을 짓고 영월로 유배를 온 단종을 그리며 눈물로 한숨을 짓던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과 여촌 최덕지 등과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며 슬픈 나날을 보내던 그였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갔다. 원호는 청령포가 발아래 아득하게 보이는 제천 사내평 산꼭대기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보고 절하고 잠을 잘 때도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잤다. 이곳에서 직접 채소 농사를 지었다. 나뭇잎에 글을 적어 채소와 글을 커다란 함지박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냈다. 함지박은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 단종이 자주 오르내리던 노산대에 머물렀다. 단종은 원호가 보낸 음식과 글을 받은 뒤 빈 함지박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그는 단종을 생각하며 여러 편의 시를 썼다.

관란정에서 본 영월 한반도면의 한반도 지형.
“강물도 한스러워 목메어 못 흐르고
갈대꽃 단풍잎엔 찬 바람 불어오네
알겠노라 여기는 장사 땀 언덕인데
임의 혼령이 어디 갔나 달빛만 밝게 비치네”


단종이 죽자 그는 영월 수주면 무릉리 백덕산 아래 토실에서 3년 상을 치른 뒤 그리고 고향 원주로 돌아와 은거하며 산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손자 원숙강(元叔康, ?~1469)이 민수사옥에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원숙강은 ‘세조실록’ 편찬 당시 사초에 작성자의 이름을 쓰게 되면 사초작성의 공정함을 기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신들의 보복이 두려워 비위관계 기록을 몰래 수정하였다가 장살 당했다. 원호는 이때 자신이 쓴 글과 상소문 등을 모두 불태우고 후손들이 벼슬을 하지 말도록 했다.

원호가 죽은 뒤 90년쯤 지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관란정을 찾았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다가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능지처참당했고 정여창은 귀양을 그의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18세의 피 끓는 청년 김일손은 원호의 ‘탄세사’에 답하는 시를 썼다.

관란 원호는 단종이 있는 영월이 보이는 이곳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강물은 흘러 흘러가고 漢之水兮滖滖
솟아오른 산은 푸르고 푸르러라 起之山兮蒼蒼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소리 鵑哭兮一聲
이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놓네 愁人兮斷腸
서리가 대지를 덮으니 울창한 숲 빛깔이 변하고 霜滿地兮喬林變色
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훤한 햇빛이 없어지네 雲遮天兮白日無光
풍채가 장대한 사람이 若有人兮頎然
양지 바른 산에 홀로 서 있구나 表獨立兮山之陽
당신은 이제 떠나 목숨을 버려도 후회하지 않으리 此君一去沒身而不悔兮
아아 나 또한 따르려고 하며 기웃거리네 我欲從之而徜佯

글·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정조에 이르러 후손 원경적이 원호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1784년 왕이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청렴결백하고 절의를 지키는 일은 정(貞)이라 하고 정직하고 사악함이 없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고 했다. 원호의 선비정신을 높이고 기림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관란정에서 문득 떠오르는 고사가 있다. 존이감당거이익영 (存以甘棠去而益詠)이다. ‘팥배나무를 그대로 남겨두라 떠나갔지만 더욱 기려 읊어라’라는 뜻이다. 천자문에 나온다. 출전은 ‘시경’ ‘감당’편이다. 주나라 소공 석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팥배나무 아래 머물며 백성들 아픈 곳을 잘 어루만져 주었다. 백성들은 팥배나무를 보존하여 기념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선정을 찬미하여 시로 읊었다. 원호의 충의 절개가 관란정 정자로 평창강 절벽에 우뚝 서 기려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난 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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