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부터 16년간 獨 최장수 총리…재임 중 동서독 통일 일궈내

지난달 16일(이하 현지시간) 향년 87세로 작고한 독일 ‘통일총리’ 헬무트 콜의 장례식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에서 엄수됐다.

일종의 유럽장(葬)으로 1일 치러진 행사에는 독일과 유럽 주요 정치인과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함께했던 전 세계 유명 파트너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명예유럽시민 콜의 역대 첫 ‘유럽장’ 아이디어를 낸 장클로드 융커 유럽(EU) 집행위원장,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안토니오 타이아니 유럽의회 의장은 상주 격으로 조문객들을 맞았다.

콜 전 총리가 안치된 관은 EU 깃발로 덮인 채 의사당 전면에 자리했고, 그 앞에는 독일, EU, 그리고 콜의 둘째 부인 마이케 이름의 조화가 놓였다.

독일과 특수관계인 이스라엘에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부인과 함께 자리했고 EU를 떠나는 영국은 테리사 메이 현 총리와 존 메이저 전 총리가 나란히 추도행렬에 동참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의 구심 역할을 하는 프랑스 역시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조문명단에 같이 이름을 올렸다. 최근 유럽과 긴장이 높아진 러시아에서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조문대표로 왔다.

한국에서는 앞서 알려진 대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당부를 받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문 사절로 나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추도사를 낭독했다.

구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콜 총리가 없었다면 나를 포함해 1990년 전까지 베를린 장벽의 뒤편에서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라며 고인의 통일 업적을 기렸다.

콜 전 총리 집권 때 장관으로 발탁됐던 메르켈 총리는 이어 콜 전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멘토’였음을 상기하며 “콜이 없었다면 나 자신의 삶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며 “나에게 준 기회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유럽에서 21세기는 그의 손목시계에서 시작됐다”며 “콜 전 총리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그가 한 사람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면서 “그 세계는 협력이 충돌보다 더 좋고, 다양한 집단이 독재자 개인보다 더 좋은 결정을 내리는 그런 세계였다”고 칭송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 세대에게 콜 전 총리는 이미 유럽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며 “그런 삶의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지금 하는 대담하고, 용기 있고, 역사적인 행동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고인과 친분이 깊었던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콜은 진정한 유럽인이자, 친구였다”라며 “유럽은 그에게 힘입은 바 크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독일의 애국자, 유럽의 애국자였다고도 했다.

그는 별세 소식이 전해진 직후에도 “나의 멘토이자 친구, 유럽의 진정한 정수였던 그가 몹시도 그리울 것 같다”라며 절통한 메시지를 남겼었다.

이들 외에 자이에르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 부야르 니샤니 알바니아 대통령, 펠리페 곤살레스 전 스페인 총리 등 수많은 전·현직 최고지도자들이 고인을 추도했다.

모두 합쳐 800여 명으로 추산된 참석자들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990년 10월 통일까지 고인의 활약과 유럽 통합 기여를 짤막한 영상으로 되새기기도 했다.

유럽의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관은 고인이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루트비히스하펜으로 옮겨지고서 배에 올려져 라인 강을 따라 슈파이어 지역으로 이동했다.

고인의 ‘고향성당’으로도 불린 그곳 슈파이어대성당에서 메르켈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미사가 열린 데 이어 사적인 추모 모임이 끝나고서 초대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콜은 1982년부터 독일 역사상 최장기간인 16년 총리를 지내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고 큰 족적도 남겼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족불화와 건강악화로 큰 고통을 받았고, 특히 가족 간 갈등은 사후에도 지속했다.

34세 연하의 둘째 부인 마이케가 고인의 유언이었다며 독일 국가장을 거부한 데 대해 그녀(1964년생)와 앙숙 관계인 장남 발터(1963년생)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했고, 루트비히스하펜 오거스하임 집에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첫부인의 자식인 발터는 이런 갈등 때문에 수년 간 콜과 아예 연락을 끊고 살았다. 첫부인 한넬로레는 2001년 햇빛 알레르기라는 희소질병으로 시달리다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 이후 콜이 마이케와 결혼한 시기는 2008년이다.

마이케는 또, 애초 메르켈 총리의 추도사를 원하지 않고 메르켈의 난민 개방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추모사를 희망했었다고 슈피겔온라인이 지난달 보도한 바 있다.

이 희망은 물론, 이내 꺾여서 오르반 총리의 행사 참석과 조사 낭독 기회가 봉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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