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위 떠오르는 태양 바라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하조대 무인등대가는 길에 바라본 애국송과 하조대 절벽

강원도 양양군 현부면 하광정리에 있다. 육지가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나와 바다와 만나는 지점, 천길 절벽 위에 장엄하게 서 있다. 아래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바다는 큰 파도가 일으켜 절벽을 때리며 부서진다. 절벽을 때리는 소리가 하조대에 까지 맑고 선명하게 들린다. 정자에서 보면 앞으로는 푸른 바다와 바다 위에 일렁이는 일엽편주 고깃배, 기암괴석과 바위섬이 펼쳐지고 정자 왼쪽에는 순백의 무인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등대는 푸른 바다와 짙은 녹음 사이에서 색 대비를 이루며 독보적이다. 이 모든 풍경은 조금 전 바다를 빠져나온 새날의 태양이 관장한다.


이 풍경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애국송’이다.소나무는 바닷속에서 금방 솟아 나온 듯한 절벽 바위에 서 있다. 수령이 무려 400년이나 됐다고 한다. 수년전 애국가 영상 화면에 이 소나무 뒤로 떠오르는 일출이 소개되면서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애국가보다 더 감동적으로 오래 기억되던 그 소나무다. 아름답고 장엄한 풍광 때문에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저절로 딴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록 그 얼굴에는 자연의 기상이 서리게 된다고 했다.

하조대는하륜과 조준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바다 절벽위에 세워졌다.
하조대는 하륜과 조준의 성을 따 지은 이름이다.

정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조 때 재건됐다가 1939년에 육모정자로 다시 지었다. 6.26때 무너졌다가 1955년 다시 건립됐고 1998년에 해체 복원했다. 정자 안에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 ~ 1647)의 시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년~ 1671년) 시가 걸려 있다. 정자 입구에 서 있는 두 개의 ‘하조대’ 각석은 이세근(李世瑾 1664~1736)이 썼다. 숙종 때 정시문과의 갑과에 급제했으며 세자시강원사서 형조참의, 공조참의,병조참의,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영조 때는 우부승지를 지냈다. 저서로는 「정헌집」과 「갱장록」이 있다.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1347 ~ 1416)과 조준(趙浚,1346 ~ 1405)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이름했다. 하륜과 조준이 만년을 보내며 청유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고 젊은 시절 이곳에서 혁명을 도모하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영판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양양지역에는 서로 앙숙으로 지내던 하씨와 조씨가 있었다. 오래 묵은 원혐도 청춘 남녀의 사랑까지는 막지 못했다. 하씨 집안의 총각과 조씨 집안의 처녀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다. 당연히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들은 저 세상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자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남은 사람들이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슴속에 담았다. 그들이 몸을 던진 절벽이름을 ‘하조대’라고 명명했다. 그야말로 전설이다.

▲ 하조대 건너편에 있는 하조대 무인등대
하조대 앞 정면에 있는 애국송

하륜과 조준이 머물던 곳인가,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가 하는 논란은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 ~ 1647)의 시 한편으로 하륜 조준 청유설이 힘을 얻게 된다. 이식은 하륜과 조준이 세상을 떠난 뒤 170년 정도 지나 하조대를 찾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하조대’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제목 밑에 ‘하륜 조순이 함께 놀던 곳이며 이로 인하여 후인들이 누대이름을 지었다’라고 썼다.

하조대 이름이 시작된 게 언제 부터인가
빼어난 경치와 더불어 성씨까지 전해 오네
큰 파도와 다투며 천 길 우뚝 솟은 누대
한 굽이 돌 때마다 깊은 못에 모였네
처음에는 격류속의 지주인가 의심하다가
상전벽해의 변천이 심함을 다시 깨달았네
상구씨가 이 즐거움을 물러준 뒤로부터
옛 자취의 풍광을 뒤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 택당 이식의 시 ‘하조대’

*지주(砥柱): 중국 삼협에 있는 저주산이 황하의 급류 속에 버티고 서 있다는 지중중류의 고사에서 유래. 난국 수습의 중책에 비유.

*상구(爽鳩): 처음부터 자리잡고 살았던 사람에 비유.

▲ 이세근이 쓴 하조대 가로각석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가로 각석

이식은 인조 때의 문신으로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선조실록》의 수정을 맡았다. 그는 천상 선비다.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인목대비를 폐서인시키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수차례에 걸친 왕의 출사 명을 거부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인조반정 후 벼슬길에 나섰으며 병자호란 때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잡혀갔다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조준과 하륜이 어떤 이유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조준은 이성계의 사람이었지만 이방원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된 뒤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다. 제1차 왕자의 난 전 후로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으며, 태종을 옹립하였다. 하륜과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함께 편찬했다. 죽어서는 이성계의 묘정에 배향됐다.문집으로 《송당문집(松堂文集)》이 있다.

하조대에서 바라본 하조대 앞바다.

하륜은 이방원의 사람이다.조선 개국 후 경기도도관찰사로 무악 천도를 주장하였지만 무학대사의 한양천도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고 이듬해 중추원첨서사에 전보되었다.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표전문이 불손하다고 트집잡자, 1396년 한성부윤으로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해명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에 승진,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진산군에 봉해지며 승승장구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하륜은 태종 재위시 4번이나 영의정을 지낼 정도였다. 


▲ 글·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이방원과의 일화 중 이방원의 목숨을 두 번 구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방원이 동생 방석을 죽이고 정국주도권을 틀어쥐자 이성계가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방원이 보낸 차사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함흥차사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성계의 스승 격인 무학대사를 보내자 마침내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하륜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이성계를 맞으러 가는 이방원에게 천막의 기둥을 아주 굵은 나무로 사용하고 곤룡포 안에 갑옷을 입도록 했다. 이성계는 멀리 이방원이 보이자 화살을 날렸다. 이방원은 재빨리 나무 기둥 뒤로 숨었고 화살은 기둥에 박혔다. 하륜은 이방원에게 한 가지를 더 주문했다. 내시에게 곤룡포를 입히라는 것이다. 이성계는 곤룡포를 입고 술을 따르는 내시가 이방원인 줄 알고 철퇴를 내리쳤다. 이성계는 그 이후 이방원을 죽이는 일을 포기했다.

이방원은 왕이 된 뒤 측근을 철저히 배격했다. 원경왕후 집안의 민씨 4형제와 자신과 혼인관계까지 맺었던 이거이를 숙청했다. 조준과 하륜이 하조대에서 말년을 보냈다면 명철보신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역할이 끝나면 물러나 아름다운 경치를 벗하며 지내는 것이 상수다. 


말을 채찍하여 높은 언덕에 올라보니
피리는 소리 멈추고 바다 위엔 구름이 길게 깔렸네
취하여 고래들을 불러 일으키니
높은 하늘에 눈을 뿜으며 석양이 춤추네


- 백헌 이경석의 시 ‘하조대’

하조대 앞바다에는 고래도 더러 나왔던 모양이다. 이경석은 말을 타고 하조대에 올라 술을 마셨고 취하여 고래를 보았다고 적었다. 1984년에 제작된 영화 ‘고래사냥’의 촬영 현장도 이 일대이다. 2014년에는 하조대 앞바다에서 고래가 혼획되기도 했다. 하륜과 조준도 머물던 당시에도 고래가 뛰놀았을지 궁금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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