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用則 耕野足矣 若媚要人(불용즉 경야족의 약미요인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살면 족하거늘 권세 있는 자에게)
竊浮榮 吾恥也 (절부영 오치야·비위를 맞추어 뜬 영화를 훔치는 것은 나에게는 수치로다)
그러나 당리당략과 자신의 안위에만 매몰되어 있던 선조나 당시 위정자들은 공을 의심하고 시기하며 공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마저 제대로 주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람 쓰는 것의 마땅함을 모르고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다. 병신· 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兩湖 )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선조실록’) “하늘을 날줄 삼고 땅을 씨줄 삼아 천하를 경륜할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로를 세웠다(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진린, 명) 이러한 경지에 이르다 보니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후일 계속해서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원균(元均)과의 관계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 흉악하고 음험함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其爲兇險無狀無狀)(계사년 2월 23일)”를 시작으로 원균에 대한 거친 비판과 비난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원균의 성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공이 그렇게까지 말하는지, 질기고 모진 숙세의 악연이 두 사람을 같은 장소에, 그것도 동시에 내려놓은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널리 알려진 시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에도 공의 우국충정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閑山島夜吟(한산도야음)
水國秋光暮 (수국추광모·바다에 가을빛 저무니) 驚寒雁陳高 (경한안진고·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네) 憂心轉轉夜 (우심전전야·근심에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밤)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