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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법학박사

정치학에서 보수주의를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법과 섭리에 기초한 질서와는 전혀 무관하다. 정치사상사에서 많은 보수주의자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쟝 보베르는 프랑스 혁명에서는 ‘일종의 종교성’이 태동하였다고 했다. 그는 법·국민·헌법 등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현재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일종의 종교와 같다. 언론도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를 읊어대며 그렇게 다룬다. 프랑스 혁명과 이후 혁명정권에서 특징적인 것은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이 단순히 정치공동체와 정치체제, 통치기구뿐만 아니라 도덕·윤리·규범의 주재자로서 역할도 맡았다는 사실이다. 구체제의 가치를 파괴한 후에 성립한 시민사회의 규범체계를 규정하는 것은 시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진 이제 유일한 권위가 되어버린 공화국이었다. 문재인의 공화국이 장자크 루소가 제시했던 시민종교(religion civile) 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촛불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참여연대가 명문대로 등극하지 않았는가!

루소는 시민종교의 목적은 국가를 유지하기에 걸맞은 시민적 덕성의 함양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민종교는 국가공동체에서 마치 현실 종교의 권위자처럼 날뛴다고 진단했다. 완벽한 도덕주의자로 포장된 문재인 정부의 고위직들이 찢어진 포장지 사이로 추한 살갗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들이 야당 시절 그토록 혐오하여 비판하던 전 정권의 실력자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보수정부의 파멸은 권력이 마치 종교와 규범의 주재자처럼 행세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도 하등 다를 게 없다. 오호통재라! 보수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를 도덕적, 윤리적, 규범적 존재로서 평가하는 것에 대한 강한 우려이다. 영국, 벨기에, 일본 등 군주제를 채용하고 있는 국가에서 보수주의자로서의 요건은 군주 및 왕실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을 꼽는 것은 드물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의 힘으로 차지한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혁명정부이다.

인간의 특권은 인간이 피조물인 것에서 유래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창조주인 신(神)의 절대성과 완전성에 대치되는 유한한 존재로서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불완전성 자각이야말로 자신과 이성을 포함한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일의 오만함을 통감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좌파 실력자들은 그들이 야당 시절 떠들던 구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편견의 일차적인 의미는 자고이래의 의견(opinions)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를 통하여 먼 과거에서 계승되어 많은 사람이 습관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결코 불현듯 나타난 현재의 일반적인 지지여론이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좌파들은 촛불의 힘으로 권력을 잡은 후 이성의 외투를 팽개치고 알몸의 편견과 오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구태를 재연출하고 있다. 그들의 오만과 편견은 인간이 유한한 피조물인 이상 피할 수 없다. 일탈과 폭주를 통제하지 못하고 방향조차 잃을까 두렵다.

서양 정치철학의 기저에 국가는 성스러운 유기체라는 감각이 존재한다. 서양에서 사회규범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신약성서에 계시된 기독교 도덕’이다. 하지만 성(聖)과 속(俗)의 사이에는 거리가 마련돼야 한다. 규범은 인간이 각각 자신의 믿음체계를 통하여 함양된 내면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코 정치(국가)에 의해서 결정되고 강제되는 법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의 제도와 성질을 바꾸는 것도 못할 리 없다는 문재인 교주의 시민종교의 사회관은 개인의 내면의 자유와 정치와 종교 분리의 중요성 그리고 국가가 시민을 교화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포기해야 성공한다. 적폐청산은 신앙심을 가진 개개인이 그 정신을 가지고 정치를 움직일 때만 가능한 일이다. 국가에 어떤 도덕적, 윤리적, 규범적 역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불완전성이라는 본질적 결함을 무시한 오만한 인간관에 입각한 공화주의자 문재인 정부에서 프랑스적 혹은 루소적인 혁명의 적폐가 우려됨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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