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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한 수필가

한반도의 허브 대구 시가지를 흐르는 신천변 ‘방천시장 김광석 길’ 건너 아파트에 둥지를 마련하여 산 지도 4년째다. ‘어울리면 이웃사촌’ ‘정들면 고향’이라고 퇴직하고 동전 뒷면의 인생 2막을 대구에서 시작하여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삼복더위에 낮에는 ‘아이스 캐기’ 동지섣달 밤에는 ‘찹쌀떡’ 하며 외치던 소리가 정겹게 들렸던 자유당 시대 선친은 내 고향 상주에서 군청공무원으로 매달 도정월보를 가져오면 나는 맨 뒷장에 경상북도 지도를 본다. 대구시 약도에 ‘태평로’가 눈에 들어와 지금도 대구 역 앞 태평로는 정감이 가고 글 뜻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 시절, 도청 소재지는 인구 80만 명의 대구시다. 그때는 보릿고개가 있던 가난한 나라에서, 해마다 남한에서 3번째 큰 대구시만 한 도시가 생겨난다고 인구 억제 정책으로 ‘둘만 잘 낳아 잘 기르자’며 요란했던 앰프 방송이 기억난다. 도내 시는 포항, 경주, 김천, 안동으로 대구를 포함하면 5개소다. 구미는 선산군, 경산시는 경산군, 상주·문경· 영천·영주시도 군이었다.

어린 시절 ‘대구 하면 사과’다. 사과를 많이 먹어 대구는 미인이 많다고 소개한다. 중 고등학교 진학하면 펜팔 열풍이 분다. 호기심에 대구 여학생과 대화하려고 우표 사러, 편지 부치러 우체통에 철없이 들락거리기도 했었다. 고향 친구가 대구에 유학하여 방학 때 내려와서 시골 도로나 마을에 뭉쳐 다니며 뽐내는 것을 보면서 부러워도 했지만, 시샘도 났었다.

내 고향 상주 농촌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자녀 뒷바라지 위해 대구에 살아보니 과거의 도시 동경은 화려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시골에 사나, 도시에 사나, 공간만 다를 뿐 사는 모습과 형태는 같다.

도시는 도시 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색다른 삶과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큰 병원과 백화점이 있지만, 돈이 많이 들고 차량 매연에 물과 공기가 나쁘다. 시골은 돈이 적게 들고 물과 공기는 깨끗하지만, 의료시설이 빈약하고 밤에는 적막하다.

살아보니, 대구는 호국 도시로 남다른 애정이 간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애국하는 국채보상공원이 있다. 그리고 민주화 원조인 2·28 기념 공원도 쌍둥이처럼 바로 옆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애국 시인 이상화 고택도 있고, 앞산공원에는 낙동강 승전 기념관에 가보니 6·25 사변에 낙동강 방어선이 경계인 대구가 방패막이 되어 우리나라의 제2 도시이자 국제 무역항이며 수출전진기지인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 창원, 포항을 함락위기에서 지켰다.

오늘날 작고 강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며, 수출대국의 위용을 세계만방에 떨치고 있어 조국을 지킨 호국의 도시 대구가 자랑스럽다. ‘글로벌 대구’를 위하여! ‘달구벌 대구’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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