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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래전에 선배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당시 이미 성공한 작가였던 그는 이제 막 작가 대열에 합류한 저에게 잊혀지지 않는 작가가 되는 요령을 전수했습니다. 첫째, 비평가들이 쉽게 개념화할 수 있는 내용을 쓸 것, 둘째, ‘3(4), 4, 3(4), 4조’의 낭독형 문체를 고수할 것, 그 둘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성공한 작가가 되려면 독자의 관심을 일거에 끌어당길 수 있는 흡인력 있는 인물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하고, ‘적재적소의 서사(敍事)를 이끌어나가는 묘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풀어나가려면 엄청난 인내력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런 진짜 공부들을 혼자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설가가 될 수 있습니다. 선배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서도 쉽게 잊혀지는 작가들의 고지식함을 나무랐습니다. 그저 ‘자존감 가득한 글쓰기’만 가지고는 독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돈도 명예도 될 수 없는 것을 가벼이 여기라는 일종의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들렸습니다.

선배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으면 저도 지금쯤 ‘봉산문학관‘ 이라는 이름을 단 큼지막한 개인 문학관 하나쯤을 세워두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배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봉산(鳳山)은 제가 본격적인 학창 시절을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하고(쌀 한 말을 지고 봉산목욕탕 2층을 찾아서 왔습니다), 현재 작은 검도장을 만들어서 몇 명의 제자, 후배들과 운동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저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세거하던 곳의 군명(郡名)이기도 합니다. 봉산탈춤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약 문학관을 세운다면 그 이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작가로서의 성공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제에 임하는 진실성도 많이 부족했고, 기교에 대한 몰입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혼자 서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거의 한평생을 자립(自立)하는데 소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타고나길 불민했고 주어진 환경도 쉽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굳이 성공을 목표하지는 않습니다. 소설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쓰는 글은 늘 ‘소설가의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 때로 제 심사를 대변합니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 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의 삶처럼. ‘중략’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8~9쪽’

제가 성공한 선배 작가의 친절한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러다가 끝내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은’ 인간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노력도 없이 작가로서의 자존감만 고집한 것도 후회됩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아직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니 고마울 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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