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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7.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의 왕이 되다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빛이 없어졌다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등록일 2017년07월13일 19시24분  
포항 호미곶에 세워져 있는 연오랑 세오녀 상봉 조각상.
유명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읽고 그 의미를 논하고자 한다. 어언 세월이 흘러 신라가 건국한 지도 200년이 지나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시대가 되었다. 신라는 초대 혁거세거서간,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례이사금(이상 박씨계), 4대 탈해이사금(석씨계), 5대 파사이사금, 6대 지마이사금, 7대 일성이사금을 거쳐 8대 아달라이사금(이상 박씨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달라왕(154년∼184년)은 156년 문경 새재 동쪽 고개인 계립령, 158년에는 죽령의 길을 열어 고구려로 진출하는 통로를 확보했으며 백제와의 전투에 앞장서기도 했다. 왜국과는 평화적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왜인의 방문이 있었고, 173년에는 왜국 여왕 히미코(卑彌乎/비미호)의 사신이 내방한 적도 있다.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상당한 명군이었다고 적혀있다.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이 없고 후사가 없어 석씨왕계인 벌휴이사금이 제9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이제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아달라왕 4년 정유(丁酉; 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이,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임금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의 작은 왕이고 진왕(眞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돌아가 찾아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가 또한 세오녀를 업고 전과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올리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고 귀비(貴妃)로 세웠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빛이 없어졌다. 일자(日者)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화(精華)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이라 어찌 돌아갈 수가 있으리오. 그러나 나의 왕비가 짠 섬세한 명주실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하면서 명주실을 주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상주하고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이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명주실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신라에 일월의 정화가 내려왔다는 신비한 이야기, 세오녀가 짠 명주실로 하늘에 제사하니, 일월이 다시 빛났다는 이야기. 신라 사람이 일본의 임금이 되었다는 기분 좋은 설화를 일연선사가 얘기해 주고 있다. 과연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에 건너가 왕국을 건립하였나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깊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경북일보에서는 이영희 교수를 중심으로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기획 연재하였었다. ‘연오랑세오녀 조’는 신라의 건국이념인 ‘광명이세(光明理世)’와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숭상한 ‘백의민족’의 정신이 구현된 설화로서, 포항시는 물론 경상북도,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매우 소중한 유산이다. 포항시와 경상북도에서 각별한 의지로 연오랑 세오녀의 학술연구와 문화교육사업에 최선을 다해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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