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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76. 이천 육괴정(六槐亭)

시대를 잘못 만났으니 산수유를 바라보며 때를 기다리네…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7월13일 20시21분  
육괴정, 기묘사화가 나자 엄용순이 짓고 김안국 등 6명의 명현들이 모여 시회와 시국을 토론했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의 봄은 산수유와 함께 온다. 원적산 꼭대기에서 봄바람이 스멀스멀 내려오고 도립리 송말리 경사리 일대에 군락하는 1만7천여그루의 산수유 나무가 일제히 황금빛 꽃을 피워올리면 바야흐로 봄같은 봄을 맞는다. 백사면의 봄 풍경을 산언덕위에서 내려다 보면 구불구불 구절양장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산수유 노란꽃 행렬이 그렇게 장관일 수 없다고 한다. 어린나무에서부터 수백 년 된 고목도 있다. 이천시는 2000년부터 ‘이천백사산수유축제’를 열고 있는데 약 2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백사면 산수유는 역사가 유구하다. 기묘사화(1519)때 느티나무와 함께 심어졌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급진적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가 죽고 신진사림이 대거 숙청당했다. 조광조를 지지했던 관료나 선비들은 죽거나 귀양을 갔다. 남당(南塘) 엄용순(嚴用順)은 이때 아버지 엄훈(嚴訓) 묘가 있는 이천 백사면 도립리로 낙향해 은거에 들어갔다. 엄용순 집안의 운명도 기구하다. 아버지는 선공감 부정을 지낸 엄훈이다. 엄훈은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돼 아버지 엄산수(嚴山壽)와 함께 이천으로 귀양을 왔다가 도립리에서 생을 마쳤다.

육괴정 편액. 여섯명의 명현이 정자 앞에 여섯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데 뜻으로 이름했다.

엄씨 가문이 갑자사화에 연루된 배경은 이렇다. 엄훈의 누이 엄씨는 성종의 귀인이었는데 임사홍이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모함한 인물로 엄씨를 지목했다. 엄씨는 장살 당하고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때 엄산수는 큰아들 엄훈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 엄회(嚴晦)는 양천에 각각 유배됐다. 엄계는 경상도 현풍현이 유배지로 결정됐다. 엄계는 현풍현 수문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성하리)의 낙동강 가에 공신정(拱辰亭)을 짓고 살았다. 연산군 말기인 1506년(연산군 12) 아버지 엄산수와 엄회가 유배지에서 사사 당하고 살아남은 엄훈과 엄계 후손들은 경기도 이천과 대구 현풍에서 세거했다.

엄용순은 도립리에 들어오자 초당을 짓고 역시 기묘사화의 화를 피해 이천에 내려와 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 ~ 1543), 규정 강은, 계산 오경, 퇴휴 임내신, 성두문등 다섯 사람과 함께 시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다졌다. 그때 정자 앞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각각 한그루씩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뒤 초당 이름을 육괴정이라 했다. 여섯 선비를 ‘괴정육현(槐亭六賢)이라 불렀다. 그때 산수유도 함께 심었으니 도립리 산수유가 산수유 마을 중에서는 가장 근본있는 산수유마을인 셈이다.

육괴정 전경. 육괴정은 정자라기 보다는 사당형태로 지어졌다.

육괴정 앞 공터에는 도립리로 들어오는 시내버스 종점 정류장이 있고 공터 가운데에는 수령 57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는 마치 분재를 한 듯 기이하고 기품있게 자랐다. 느티나무는 시내버스가 마을을 돌아나가는 로터리 역할을 하고 있다. 느티나무 옆에는 엄용순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연못, 남당이 있다. 연꽃을 심었다는 못은 메워져 규모가 볼품없이 작아졌고 물은 말라 잡초만 무성하다. 6그루 느티나무 중 세 그루는 고사해 새로 심었고 세 그루는 570년 세월 동안 육괴정을 지키고 있다. 웅혼한 기상이 느껴진다.

육괴의 ‘괴(槐)’는 회화나무를 말하는데 느티나무로도 해석한다. 옛 어른들은 회화나무를 잡귀를 막아주는 나무로 인식했다. ‘나무(木)’자에 ‘귀신(鬼)’자가 붙은 이유다. 느티나무는 정자나무라고도 하고 의병을 불러 모으는 나무라고도 한다. 나무가 크고 나무가 만드는 그늘이 넓고 시원해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쉬며 마을의 공동관심사를 논의하는 정자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또 나라에 외적이 침입해오면 나무 밑에 징과 북을 걸어 사람들 불러 모았다고 해서 의병나무라고도 한다. 오래된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 역할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 나무 아래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나무(木)’에 ‘귀신(鬼)’이 더해진 이유로 합당하지 않을까.

▲ 육괴정 앞 느티나무. 수령이 570년이나 된다.
‘괴(槐)’는 큰일을 할 사람, 위대한 학자의 의미도 있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태사 태부 태보 등 삼공(三公)을 ‘삼괴’라고 했다. 경주 강동면 삼괴정은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이방린 이유린 이광린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고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백세각 앞의 세 그루 느티나무는 그런 뜻으로 심었다.

도립리 괴정 육현중 눈길을 끄는 인물은 김안국이다. 김안국은 당대의 명현이었다. 김굉필의 제자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성리학의 정통계승자였다. 조광조 기준 등과 함께 사림파의 도학정치를 주도했다. 기묘사화때 겨우 죽음을 면해 동생 김정국과 함께 파직당했다. 그는 도학정치를 조선사회가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조광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실천 방법론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다.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조광조와 달리 김안국은 온건했다. 조광조의 급진성에 회의를 느낀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로 외직을 돌았다. 그 덕에 기묘사화때 목숨을 건졌다.

▲ 육괴정 앞 남당, 엄용순이 자신의 호를 따 이름하고 연꽃을 심었다고 하나 지금은 못이 메워지고 물이 말랐다.

파직을 당한 그는 곧바로 고향 이천으로 낙향해 부발읍에 은일정과 동고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에 들어갔다. 육괴정에서 시회를 열고 시국을 토론한 것은 물론이다. 김안국은 파직후 19년을 이천에서 은거하다가 예조판서 우찬성겸 문형 좌찬성에 올랐다. 죽어서는 인종의 묘정에 배향됐으며 여주 기천서원과 이천 설봉서원 의성 빙계서원에 제향됐다. 중종시절 관료였던 그가 인종의 묘정에 배향된 것은 인종의 동궁시절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용모 아직도 남아있고 솜씨도 뛰어난데 容謝尙存傾國手
슬픈 거문고로 밤 깊은 노래 하네 哀絃彈出夜深詞
리마다 인생의 황혼 원망하는 듯 한데 聲聲似怨年華暮
네 뜬 인생과 늙어감을 어이하랴 奈爾浮生與老期
- 김안국의 시 ‘늙은 기생 상림춘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쓸 때 김안국은 기묘사화의 여파로 파직돼 이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 빼어난 용모로 고관대작의 사랑과 연모를 받다가 늙어서 불우한 처지에 있는 기생 상림춘에 자신의 처지를 대입시킨 시다. 그 세월이 19년이다.


괴정 육현 중 강은은 조광조가 신진사림을 관료로 발탁하기 위해 만든 현량과에 급제해 검열의 벼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이후 현량과 합격자를 파방하면서 이천으로 낙향했다. 그는 현량과가 복구돼 전적에 올랐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천에 머물면서 김안국등과 학문을 강론했다.오경은 막내동생 오상과 함께 김안국의 제자로 공부를 했다. 학문과 자질이 뛰어나 김안국의 제자 중에서도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합격 소식을 들은 이튿날 고향 이천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 글·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임내신은 퇴계 이황의 제자다. 수찬 장령을 지냈으며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좌승지에 까지 올랐다. 벼슬에 물러나서는 고향 이천으로 돌아왔다.

정자는 사당 형태로 지어졌다.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본당과 담장, 대문으로 돼 있다. 본당은 가운데가 한 칸이 마루, 좌우 양쪽에 방이 각각 한 칸씩 본당 안에는 엄용순의 손자인 엄유윤의 충신정문과 ‘남당엄선생육괴정서’ ‘육괴정 중수기’ 등 현판이 걸려 있다. 엄유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서생으로 의병을 이끌고 세종대왕 영릉을 호위하며 적과 싸웠다. 화살이 떨어지자 여주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고종 때 이조참의에 증직되면서 정려문이 내려져 육괴정에 걸려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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