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의 젊은 왕 숙종은 아들을 낳아준 장희빈에 푹 빠졌다. 그 때문에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출시키기로 했다. 유교 국에서 왕이 별다른 이유 없이 정처를 축출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속으로는 반대했지만 대놓고 “폐출은 불가하다”고 직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오두인을 비롯한 86명의 선비가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로한 숙종은 친국을 하겠다며 오두인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왕은 상소문을 누가 썼느냐고 다그쳤다. “박태보입니다” 박태보는 ‘사변록’의 저자로 유명한 박세당의 아들이다.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출세가 예약돼 있던 앞길 창창한 39살의 장년이었다. 분기탱천한 숙종은 잡혀 온 박태보를 보자마자 형장부터 가했다. 박태보는 자신이 상소를 섰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박태보는 자신은 기만한 적도 잘못을 저지를 적도 없기에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도리어 숙종이 정비를 내쫓는 것이 잘못임을 환기시켰다.

박태보의 침착하고 조리 있는 답변에 분노가 폭발한 숙종은 몽둥이로 입을 치라고 하면서 빨리 죄를 인정하라고 재촉했다. 무슨 죄를 인정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박태보의 대답에 숙종의 “매우 쳐라”는 호통이 계속됐다.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몸을 지지는 혹형을 26번이나 당한 박태보는 만신창이가 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더 이상 국문을 할 수 없게 되자 진도로 귀양 보냈다. 박태보는 진도로 귀양 가는 길에 과천에서 온갖 악형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백절불굴의 생을 마감했다. 박태보는 왕의 탈선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것이다. 다른 신하들처럼 침묵했다면 명문가의 자제로 출세길을 달릴 수 있었지만 편하고 쉬운 출세길을 택하지 않고 죽음이 기다리는 원칙의 길을 택했다.

호텔에서 기습 이사회를 열어 원전공사 중단을 날치기로 결정한 한수원 이사들, 박정희기념우표 발행을 취소한 우표발행심의위원들의 권력 코드 맞추기는 비굴함의 극치다. 박태보 같은 간신(諫臣)은 없고 간신(奸臣)만 득실거리는 정권이 성공한 예는 없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