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헤르만 헤세의 명작 ‘데미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입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그녀를 ‘이상적인 인간의 형상’을 띤 존재로 인식합니다. 심리학자 융(Jung)의 표현대로라면, 그녀는 한 인간의 삶의 목표를 단번에 결정짓는 ‘장엄한 대상 이미지’로서,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서, 동일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였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녀의 ‘아들-연인(son-lover)’이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모방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쟁자가 됩니다. 책 제목이 ‘데미안’이 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을 발표할 때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작가로서 제2의 인정투쟁에 들어가겠다는 자기선언이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데미안’이었다는 것도 곧 자기동일성의 차원에서 ‘헤세=싱클레어=데미안’의 등식을 꼭 이루어내겠다는 집념의 표현이었습니다. ‘데미안’은 자아의 성장 여행에서 만난 뚜렷한 이정표였으며 최종 목표지점은 합일의 대상으로서의 완전한 인격체, ‘위대한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습니다.

‘싱클레어죠. 금방 알아봤어요.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따뜻했다.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선하고 성숙한 입을, 자유롭고 당당한, 그 표적을 지닌 이마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말하며 두 손에 키스하였다.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가 어머니처럼 미소 지었다.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 ‘친한 길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이지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녀에게로 오는 길에 느낀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또 그녀의 말은 아들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더 성숙하고, 더 따뜻하고, 더 자명했다. ‘헤르만 헤세(전영애), ‘데미안’ ‘에바 부인’, 188쪽’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한두 명의 ‘데미안’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데미안’이 다 성숙한 인격을 선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데미안’도 존재합니다. 흔히 ‘마마보이’라고 부르는 미숙한 자아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끝까지 자신의 내면에 고착된 의존의 대상을 지워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아들-연인’(물론 ‘딸-연인’도 많이 있습니다. 편의상 ‘아들-연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지 꼭 남자에게만 그런 ‘어두운 데미안’이 존재한다는 말은 아닙니다)은 성숙한 자아가 거쳐야 하는 개성화 과정을 끝내 회피합니다. 그들의 ‘어두운 데미안’은 모태적(母胎的) 우로보로스 상황(무책임과 방임의 혼돈적 심리상태)을 결단코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대표적 희생자가 현실의 연인, 현실의 가족과 동료들입니다. 이들 마마보이, 마마걸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결핍을 호소하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상대를 자신의 불안에 초대합니다. 초대를 거부할 때는 가차없는 보복을 가합니다. 그리고 얼른 어머니의 치마폭 안으로 숨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전에서 확인하지 못하면 곧 소멸되어야 할 운명이기에 그들 어둠의 자식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사회적 고통의 현재화를 이루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불안을 대상에게 전이시켜 고통받는 타자들을 보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찬양, 고무합니다. 문득, 우리 안의 두 세계, 데미안의 두 얼굴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