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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무 수필가

시중에서 팔고 있는 감을 볼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때의 감은 요즘 시중에 나오는 감이 아니라 어릴 적 고향 집 주위나 텃밭, 뒤꼍에 심겨 있는 토종 홍시나 곶감인데 특이한 것은 검은 빛깔이 흩어져 있는 소위 먹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감은 지난 옛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애잔한 사연들이 얽힌 추억들을 숨죽여 조용히 연상케 한다. 일제 강점기와 조국 광복과 6·25와 5·16 격동기와 1960년대의 호구지책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배고픔의 고통을 감나무에 의지했던 이야기를 해본다.

봄에 감꽃이 필 때면 어머니께서는 이른 아침에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오라고 단잠을 깨우면서 성화셨다. 이 감꽃을 밥에 얹어서 보태서 먹기도 하고 가루에 쪄서 간식으로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감꽃이 떨어진 뒤에는 밤톨만큼 자란 작은 감이 빠지는데 아침이면 어머니께서 감을 주워 오라고 재촉하시는 소리가 그때는 너무나 피곤하게 들렸다. 이 감이 반쯤 익으면 마당에서 일하다가 쉽게 손이 가는 곳이 감이라, 그 감을 따서 옷에 문질러 먹는 것이 배고플 때 유일한 간식거리였다. 그때를 지금의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라면도 없습니까?” 하는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케 한다.

초가을쯤 필자가 공부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무언가 버적버적 깨물어 잡수시는 소리에 잠을 깨서 보니 절반쯤 익은 생감이었다.

농사일하시는 아버지께서는 봄에 쓸 못자리 새끼를 꼬시다가 배가 고팠으나 간식거리가 없어서 밤에 앞 담 옆에 있는 감나무 가지를 더듬어 감을 따가지고 밤참을 잡수시는 것이었다.

이때는 40~50년대의 격동기에 상상치 못할 식량난으로 초근목피로 호구지책을 해야 하는 절박한 시기이기에 끼니조차 챙겨 드시지 못한 참혹한 시대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연상할 수 있다.

이처럼 감꽃과 떨어지는 감을 주워 먹고 홍시와 곶감으로 아이에게 모유 대신 영양식으로 먹이고 대소 행사와 제례에 이용하는 것이 당시의 돈나무인 감나무였다.

여름에는 감나무 그늘 밑에 멍석을 깔고 장기바둑 놀이를 하던 쉼터이기도 하고, 아낙네들이 끼리끼리 모여 길쌈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필자가 학교 재학시절 아버지께서 볼일이 있어서 출타 셨다가 오실 때는 기침 소리가 나는 곳은 집 뒤꼍 감나무 밑을 지나오실 때다. 뒤꼍 감나무는 아버지 귀가시간을 알려주는 오랜 정서가 얽힌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나무이다.

그러므로 고향 감나무는 어머니 아버지와 고락을 같이 한 인연의 나무로써 고향 가는 길에 고목이 된 감나무 밑에 서면,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나고 어릴 적 이 감나무에 오르내리면서 감을 따던 기억도 나고, 황폐해진 집터를 바라보면 세월의 무상과 어쩐지 가련하기도 하고 애잔한 사연과 추억들이 얽힌 고향 감나무는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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