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7월 3일 대한민국 '떠들석', 중화학공업 시대 힘찬 개막 한 발짝

포항제철1기 종합준공식(1973)
1)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3배의 제철소 1기, 첫해부터 ‘흑자’

‘보라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불꽃 / 여기는 잠자지 않는 일터 / 地軸을 흔드는 우렁찬 소리 / 파도보다 더 높은 젊은 의욕 / 우리는 땀과 양심과 성실을 바쳐 / 새 역사의 바퀴를 떠밀고 간다 / 조국과 인류의 영광을 위해’

1973년 7월 3일 마침내 영일만에서 연산 103만톤 규모의 종합제철 공장이 준공된다.

포스코사보 쇳물지에 게재된 ‘7.3준공’
포스코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7.3준공’이다.

기준공기념 鐵병풍.
1970년 4월 1일 착공해 3년 3개월 만에 준공한 이 대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포항종합제철이 특별히 제작한 철병풍에 새겨진 노상 이은상의 축시처럼 ‘7.3준공’은 대한민국 역사의 큰 수레바퀴를 몇 바퀴나 전진시킨 사건이다.

7.3준공식에 직원들이 가슴에 달았던 리본.
포항종합제철은 1973년 7월 3일 오후2 시 박정희 대통령과 3부 요인, 내외귀빈과 회사 임직원 및 건설요원이 참석한 가운데 포항 현장에서 1기 설비 종합준공식을 가졌다.

포항제철소 1기 준공 기념우표.
준공식이 열리는 날, 포항보다 오히려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체가 떠들썩했다. 서울 중심가에는 초대형 아치가 설치되었고 행사참석 내빈수송을 위해 서울에서 포항까지 특별열차가 편성, 운행되었고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이날 준공식에서 박태준 사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종합제철의 탄생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온 국민의 열의의 소산”이라고 말하고, “종합제철은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기틀이 되고, 중화학공업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여 더욱 비약적인 국가 경제발전에 공헌할 것을 확신하며 1973년 12월 260만 톤 규모로의 확장사업에 착수하여 국가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혀 2기 건설 의지를 시사했다.
1973년 7월3일 준공식날 포철 실업축구단이 첫 공식경기.
이어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3년 전인 1970년 봄 롬멜하우스 앞에서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과 함께 기공식 버튼을 눌렀는데, 지금 이곳에 초현대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하여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라고 회고한 후 “조강 연산 103만톤의 종합제철공장의 문턱을 넘어서 훨씬 더 깊은 곳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포항종합제철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발전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종합준공식에서 단체 표창 수치를 달아주는 박정희 대통령.
이어 박 대통령은 전 임직원에 대한 단체표창의 의미로 포스코 회사 깃발에 수치를 달아 주는 한편,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명예회장과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 회사의 고준식 부사장과 박종태 제철소장 등 건설에 功이 큰 인사들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은 1973년 4월 17일 전국경제인대회에서 박태준 사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고 포항종합제철도 건설 기간 중 취한 각종 징계조치를 해제하고 전 직원 1호봉 특별승급을 실시했다 .

포항제철소 1기, 공장준공을 기념해 광화문에 세워진 대형아치 기념우표는 물론 서울서 포항행 특별열차도 운행되었다
제철소 1기 준공은 당시 포항보다 온 나라를 술렁이게 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慶祝 포항종합제철 준공’이라고 쓴 기념 아치가 세워져 국가 숙원사업의 역사적 준공을 축하하는 국민의 감격을 대변해 주었고, 제철소는 산업시찰의 명소로 떠올랐다.

고로완공을 축하하는 일본 기술자문단의 사인.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전 매스컴은 일제히 준공 사실을 뉴스, 특집, 사설 등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한결같이 1기 설비의 성공적 준공을 축하하고 건설 역군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중화학공업 시대의 힘찬 개막을 기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 경제국보1호-포항제철소 1고로.
1기 설비의 준공은 그 규모 면에서도 같은 시기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달했지만 가동 첫해에 투자비를 모두 뽑고 ‘흑자’를 기록하는 역대급 기록을 남겨 의미를 더했다. 또 1 기설비 건설 당시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은 제철소 건설 역량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었는데 3년 3개월간의 공사 기간 동안 영일만에서는 토목, 전기, 설비안전 등 모든 분여의 국내 기술 수준을 급성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박태준사장이 읽은 경과보고서.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부터 정부가 주도한 다섯 차례의 종합제철 건설 사업이 번번이 무산된 후, 우여곡절 끝에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해 건설한 것으로 우리나라 철강사(鐵鋼史)상 그 의의가 깊다. 특히 1기 공사는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해당하는 1천205억원이 투자되고 연인원 581만명이나 투입된 사상 초유의 대형 공사로 초기 포스코 건설 역군들의 제철보국(製鐵報國)에 대한 투철한 의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 쾌거로 평가받았다.

또 설비 가동 1년 만에 당시 투입된 외자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242억원의 흑자를 시현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흑자 전통을 지켜와 자체자금으로 계속되는 확장사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포항제철소 첫 제품출하.
조업 첫해 기록적인 흑자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초기 제철소 건설요원들이 공기를 단축해 건설비를 낮췄으며 설비와 원료를 싼값에 구매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일찌감치 해외연수를 통해 자체 기술요원들을 훈련시킨 결과 1기 설비를 자체 기술진의 힘으로 가동했다. 무엇보다 모든 포스코인이 제철보국의 의지와 사명감으로 뭉친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포스코는 기본적인 원가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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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이렇게 포스코는 우리나라 경제사에 획을 긋는 영일만 1기 대역사를 일단락 짓고, 쉴 틈도 없이 다시 세계 최고의 제철소로 성장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 피스코 대신 포스코
△피스코가 ‘포스코’(posco)가 된 사연

지금 ‘포스코’라는 사명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글로벌기업 POSCO의 사명이 PISCO가 될 뻔 하기도 했다.

정명식 포스코 전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된 1973년부터는 국내외 VIP급 내빈들의 제철소 방문이 잦아지자 임원으로서 상황실 영접을 주로 맡았다. 정 전 회장은 외국인 VIP에게 영문 상호 ‘Pohang Iron and Steel Company Ltd.’라는 기다란 명칭을 쓰기가 까다로워 ‘POSCO’라는 약칭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영문회사명의 이니셜을 그대로 따면 ‘PISCO’가 되는데, 그는 포항에 있는 제철소인 만큼 ‘포항’의 ‘포’를 살리고 싶어서 ‘POSCO’로 한 것이 지금의 공식 회사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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