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jpeg
▲ 한정규 문학평론가
19세기 말 전후부터 많은 한국인은 일제식민지탄압에 맞서 국내는 물론 미국 하와이지역 만주지역 러시아 연해주 지역 그 이외에 중국 내 각 지역 하물며 일본 내에서까지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일제는 1918년 이후 한국인 탄압을 위해 한국에 일본 군인을 약 2만3000명, 헌병과 경찰 1만3400여명, 조선총독부관리 2만1300여명 등 총 5만7700여명을 무장 한국으로 보내 독립운동 가를 탄압했다.

혹독한 일제의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도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국내 독립운동의 특징을 보면 비밀결사대. 비무장 비폭력운동, 민족과 민족문화보존을 위한 민족문화운동, 물산장려운동과 민족 실업운동,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 학생독립운동의 비중이 크고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것, 여성 민족운동이 대두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는 점, 농민운동이 민족운동의 한 몫을 점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이다.

그와 같은 특징 중 비밀결사대는 일제가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 다시 말해 사자와 같은 행위 학살정책 때문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와 같은 비밀결사대로는 참여자가 많고 적고를 떠나 전국에 수없이 많았다. 그 대표적으로 신민회, 대한독립의군부, 대동청년당, 대한광복회, 대성학교출신 비밀결사대, 천도교 구국단, 조선국민회, 이중연 비밀결사대, 자진회, 그 이외 각종 민단 조직 등이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경북지역에서도 안동농림의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비롯한 예천 등에서 의병진이 조직됐다. 예천에서는 박주대 와 박주학 형제가 예천의진에 참여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가 박주대는 1836년 12월 23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896년 2월 경북 예천에서 창의한 예천의진 창의장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얼마 뒤 몸이 아파 동생 박주학을 대신 보내 의병진의 부장을 맡게 했다. 박주대는 몸이 아프면서도 창의통유문을 작성 유림에 발송함은 물론 각지 의병진을 지원했다.

박주대를 대신 독립운동에 가담한 동생 박주학은 1843년 3월 28일 예천에서 태어나 1896년 예천의병에 편성 서상렬 의병과 안동, 예안, 풍기, 봉화, 제천 등지 의병들과 연합했다.

연합의진이 상주 태봉에서 일제 관원과 격전을 벌일 때 박주학이 참여했다. 그 공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형 박주대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박주대와 박주학 형제 그리고 집안 족형 박주산, 외조카 김대락, 조카사위 이상룡 등이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그렇게 친인척 다수가 독립운동을 한 예는 많지 않은 일이었다.

그분들의 애국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