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이름 붙이기를 한다. 이름을 부여하면 그 사물의 성질이나 현상의 본질이 좀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지리학자 주재성 경희대 교수는 이런 인간 본성을 ‘호모 오노마스티쿠스’ 즉 ‘이름 짓는 인간’이라 했다.

오래전부터 유명한 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을 하곤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수도 없이 많은 모습으로 분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은 뛰어난 공감능력 때문이라며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 ‘호모 엠파티쿠스’라 명명했다. 역사학자 요한 하우징어는 모든 인간은 유희적 본능이 있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 정의했다. 행동생태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공생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를 주창했다. 사람은 서로 어울려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19세기 이후 도구를 만드는 ‘호모 파베르’로 진화해서 이제 신에 도전하는 ‘호모 데우스(제우스의 라틴식 이름)’까지 왔다. 데우스는 ‘신’이다. ‘사피엔스’를 쓴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후속작 ‘호모 데우스’에서 신에 도전하는 인간의 미래를 전망했다. 우리나라의 올해 주민등록상 100세 이상 인구가 1만8000명을 넘어 ‘호모 헌드레드’라더니 인공지능(AI) 알파고를 만든 구글 의 자회사 ‘칼리코’는 인간 질병을 완전 정복하는 ‘인간 500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호모 파이브헌드레드’. 이쯤 되면 ‘사람’이 이제 ‘신’과 맞먹자는 것이다.

‘호모’ 접두사에 들끓는 현실을 반영한 이름짓기가 범람하고 있다. 휴대폰 중독자를 ‘호모 모빌리티쿠스’, 앉아 일하는 사람을 ‘호모 체어쿠스’라고 한다. 또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밤 생활을 즐기는 ‘호모 나이트쿠스’가 등장했고, 생산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소비하는 ‘호모 콘수멘스’의 주체, 인간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호모 쓰레기쿠스’라는 말까지 나왔다. 성균관대학에서는 인생이 시험의 연속이란 점에서 ‘호모 이그제미쿠스’라며 관련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가을, 나는 어떤 ‘호모 사피엔스’인가.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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