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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그림(Grimm) 형제가 모은 전래동화를 현대 동화(童話)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필요 없는 덧붙임’ 때문에 원본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처럼 나돌아다닌다고 불만스럽게 말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 말로는 백설공주라는 이름도 잘못된 것이랍니다. ‘새하얀 눈 아이’를 ‘백설공주’로, ‘그 못돼 먹은 여자’를 ‘왕비’로 옮기고, ‘눈처럼 새하얀’, ‘피처럼 붉은’이라는 표현을 ‘눈처럼 하얀 살결’과 ‘피처럼 붉은 입술’로 바꾼 것과 몇몇 잔혹한 묘사 장면들을 고의로 삭제한 것들이 원전의 문학성을 크게 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성인용이 아동용으로 개작되면서 이루어진 ‘적응과 순화’가 원작의 작품성을 많이 훼손하고 있다는 겁니다. 본디 ‘적응과 순화’는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 이동할 때 많이 이루어집니다. 쉽게 이해되는 어법이나 구성(인물, 사건, 배경), 그리고 독자가 몸담고 사는 곳의 문화나 금기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적응과 순화’입니다. 쉽게 바꾸는 것이 ‘적응’이고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 ‘순화’입니다. ‘새하얀 눈 아이’가 ‘백설공주’로 바뀌는 과정 역시 그 ‘적응과 순화’의 과정일 것입니다.

형 야코프(Jacob Grimm,)와 동생 빌헬름(Wilhelm Grimm)이 모은 그림동화(1812)가 잔혹 동화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순화시켜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른들의 아동관(兒童觀)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이를 보는 눈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대체로 양극적입니다. 천사 아니면 악마입니다. 보통, 나쁜 상황에서는 자기 아이는 천사일 공산이 크고 남의 아이는 악마가 될 공산이 큽니다. 또 순진무구한 동심을 이야기할 때는 전자 편에 서고, 욕심꾸러기 말썽쟁이를 말할 때는 후자 편에 서게 됩니다. 우리도 아이 시절을 다 겪었습니다만, 사실은 그 양 극단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이들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유독 부모가 되면 아이들에게서 어느 한쪽 면만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내 아이가 잘못되면 반드시 다른 아이들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상황에 따라, 혹은 상대에 따라, 착한 인간도 되고 악한 인간도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제 경우를 보자면, 어린 시절은 거의 사탄의 시동(侍童)에 가까웠습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한 번 크게 흔들리고, 이런저런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선과 악을 나누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가면서 차차 슈퍼에고의 명령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락에 저는, 순자의 성악설이나 브루노 베텔하임 식의 정신분석적 관점(어린 아이들은 모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라는)이 동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훈육(위협과 공포)도 없고, 사랑(보살핌과 보상)도 없다면 인간은 야수 그 자체로, ‘자연(自然)스럽게’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대놓고 본능이 안내하는 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겁니다. 위협이든 보상이든, 훈육이든 사랑이든, 어른들은 반드시 무언가 아이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베푸는 것’이 있어야 아이들은 어른의 지휘를 받습니다. 베풀지 않아도 저절로 아이들이 선한 인간이 되고,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도덕심을 길러낼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그런 생각을 지휘하는 게 바로 사탄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신데렐라로 키우려면 ‘마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나 이웃의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모나 이웃이 없으면 밤에만 나타나 도와주는 늙은 마법사라도 한 명 있어야 제대로 커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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