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포항 1세대 화가들 이야기 (5) - 1919년 출생…유복한 생활, 지역 최초 미술화랑도 열어, 오직 지역화단 발전에 힘써

이종기 포항시립미술관 도슨트

향토화가 김준식은 1919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태평양미술학교 유학시절 이외는 경주를 떠나 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경주보통학교 때 미술대회에서 상장을 받는 등 어릴 때부터 미술재능이 돋보였다. 일본 유학이 끝나자 귀향해 당시 일인 경주박물관장 밑에서 신라 고고미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해방과 함께 결성된 경주예술가협회에서 활동을 하고, 특히 1946년 남한 최초의 예술대학격인 '경주예술학교' 개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동교 교장직도 수행했다. 그 후 서라벌 미술가협회장, 한국 미협 경주지부장, 신라문화제(8회)대회장을 역임하고, 계속해서 한국미협 경주지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오직 지역화단발전에 힘쓰며 경주에서만 살다간 미술인이었다. 또한 경주고적보존회(경주박물관 전신)로부터 사무 위촉을 받아(1944) 신라기와와 금석문의 탁본 및 자료. 수집 등으로 신라문화유적에 관한 보존 체계화에 힘썼으며, 그 후 여러 해 동안 석굴암의 석조물 구조연구에 매진한 향토사학인이기도 했다.

23일 마무리된 포항시립미술관 '영남의 구상미술展'에는 김 작가의 유품과 자료들이 많이 비치돼 있어, 그에 대한 갖가지 이력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가 자필 한자로 깨알같이 쓴 이력서가 있고,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졸업증서, 결전미술전람회 특선상장, 경주고적보존회로부터 받은 사무위촉장등이 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때 국민총력 경상북도 연맹회장으로부터 받은 상장에는 상품이 '금 일봉'으로 기재돼있어 신기하기도 하다. 해방이 되고 받은 경주예술학교장 임명장은 당시 종이가 귀한 탓인지, 붉은 선이 그어진 편지지에 붓으로 임명사항만 간단히 써져있고, 70여 년 전에 받은 '대한민국정부 문교부장관'명의의 초중교사자격증도 있다. 여러 증서들이 이미 빛이 바래 낡아있지만 지난 세월에 담긴 그의 혼과 열정이 배어 있어 숙연해진다. 이 귀한 자료들을 꼼꼼히 보관해온 유족들의 성의에 놀랍고, 또 이를 그들로부터 찾아 전시한 포항 시립미술관 관계자들의 노고도 돋보인다.

그는 처음 가정 형편이 유복해 경주에서 제일 처음 미술화랑도 열었다. 여기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도 마다않고 했고, 6.25때 피난 온 중앙의 선배화가들을 그의 집에 기거시키며, 돌봐주었을 만치 의리파였다고, 그를 선배화가로 모셨던 경주 현역화가 최용대 씨가 귀뜸 해주었다. 또 한 가지 일화로, 50년대 대구에서 마산 출신 화가인 문신(文信)의 작품전시회가 열렸으나 작품매매가 안되자 청마 유치환선생이 주선해 경주 어느 다방에서 다시 전시회를 열게 했다. 이때 그가 문신의 대표작인 '생선'을 사주었는데, 훗날 관성(김준식의 호)이 어려울 때, 문신이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그 자기작품을 구입하며, 그가 보여준 의리에 고마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작품은 지금 '마산 문신 미술관'에 소장 되어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고향을 위해 산 그였건만 말년에는 오래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 1992년 작고했다.

포항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8점이었다.

'다보탑이 있는 풍경', '향원정', '숭혜전', '남산이 있는 풍경', '반월성', '토함산 일출', '구룡포 풍경'과 '노모상'인데 거의 그의 고향인 경주주변의 유적과 풍경을 대상으로 그린 향토색이 짙은 그림들이다. 그 외 '해녀', '누드' 그림 등 다수 있으나 개인소장으로 흩어져있어 보기가 힘들다. 그는 선전, 국전에 입선했으며, 제 4.5회 대한 미술원전에 출품했고, 제2회 금복 문화상(1988)을 수상한 바 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