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서 건너간 말취·사신지, 일본에 신라식 제철법 전해

신광면사무소 뜰에 있는 '영일냉수리실라비' 전각.

"신광(神光). 비학산 아래 이 드넓은 들판은 일찍이 대단위 제철(製鐵) 공장 터였다"고 하면 좀처럼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일 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의 비문을 살뜰히 읽어보면 그 사실이 영락없이 드러난다. 고대의 제철은 강모래 속에서 거두어 올린 사철(沙鐵)을 원재료로 썼다. ①이 사철을 진흙으로 빚은 가마솥에 넣는다. 여기에 얄팍하게 구운 숯 조각을 함께 보탠다. ②이 숯 조각에 불을 붙여 72시간(사흘 밤낮) 내내 불 땐다. ③사철이 가마솥 속에서 깨끗이 녹으면 불 때기를 그만두고 흙가마 속의 무쇠가 식기를 기다린다. ④무쇠덩이가 식은 다음 진흙 가마를 깨트려 완성된 강철 덩이를 끌어낸다. 이 강철덩어리를 고대어로 '깨라'라고 불렀으며 '무(金+母)'라 한자표기 했다. ⑤이 강철을 잘게 쪼갠 깨라로 고대 한국인들은 칼 도끼 등 무쇠 도구를 만들었다.

일본 나라시(奈良市)에 있는 아름다운 산 미와야마(三輪山). 신광의 비학산을 닮았다.

한편, 무쇠를 녹이는 진흙 가마솥 속에서 죽처럼 된 철액(鐵液)을 가마솥 아래쪽 구멍을 통해 받은 것을 '선(銑)'또는 '선철(銑鐵)'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냄비, 솥 등 무쇠도구를 만드는 데 썼다.

이 같은 신라의 고대제철법은 일본 서해안 일대의 이즈모(出雲)지방 등으로 널리 전파되어 이 고장에서는 지금도 음력 정월초하루 날이면 반드시 5,6세기 신라식 제철법으로 무쇠를 만들고 있다.

일본에는 '일본미술도검(刀劍)보존협회'라는 모임이 있어 지금도 예대로의 일본 칼을 만드는 모임이 있는데, 이 단체에서는 반드시 '신라방식대로 만든 강철'로만 칼을 제작하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신라식 제철'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식 제철법으로 만든 무쇠라야만 제대로 된 일본 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국보 제 264호 신라비가 세워져 있던 옥수수밭을 새마을지도자 김용준씨가 가리키고 있다.

5세기의 일본 이즈모 지방에 망명한 신라 사나이 집단이 있었다. 바로 신라의 신광에서 일자리를 빼앗기고 오갈 데 없어진 말취(末鄒)와 사신지(斯申支)가 이끄는 제철집단이었다. 이들은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겨 흥해 항구를 거쳐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항으로 상륙, 요즘의 나라현(奈良縣)으로 진출했다. 503년의 일이다. 이들은 사철이 무더기로 건져지는 미와(三輪)에 정착, 제철을 시작했다. 본격적 제철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일본이 최초로 펼친 신기술 공업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이 '503년'을 산업혁명의 해로 점 찍고 있다. '구리의 시대'에서 '무쇠의 시대'로 진출한다는 것은 산업시대에의 비약을 의미한다.

일본 나라켄(奈良顯) 사쿠라이시미와 1422번지에는 현재 큰 사당, 일본식 명칭으로 '진자(神社)'가 세워져 있다. 이 사당이 바로 신라의 신광에서 건너간 말취와 사신지 두 사나이를 기리고 있는 사당이다. 사당 바로 뒤에는 미와야마(三輪山)라는 산이 솟아있다. 비학산을 닮은 아름다운 세모 모양의 산이다. 이 산에서 산출되는 무쇠가 냇물 따라 기슭으로 흘러내려와 사철(沙鐵)의 연못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곳 지명 '미와(三輪)'를 우리말로 옮기면 '둥근 물밭'이다. 사철이 넘치는 '둥근 물밭'이라는 뜻이다.

일본 나라시(奈良市)에 있는 미와신사(三輪神社). 미와산을 받들어 제사 지내고 있다.

철분이 풍성한 물고장에서는 '맛있는 쌀'이 생산된다. 현재 이 미와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일본 최고의 술(청주)을 빚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에서 건너간 제철기술자는 현재 '술의 신'으로도 받들어져 있는 셈이다.

신광 들판에도 '둥근 물밭'이 있었다. 바로 국보 제 264호 석비에 적힌 절거리(節居利)가 살고 있었다는 진이마촌(珍而麻村)이다. 이 고을 이름을 한글로 풀면, '돌아가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지증왕은 '재(財)'를 진마이촌에 사는 절거리에게만 몽땅 줄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말하는 '재'란 그 물 속에서 건져지는 사철을 가리킨다. 여기서 건져지는 사철을 앞으로 모두 절거리의 것이라는 엄명이었다.

비학산 기슭에 세워진 겹 3간의 작은 절 '법광사'.

사철 없이 제철은 할 수 없다. 지증왕을 비롯한 신라 육촌의 우두머리들의 엄명은 바로 이 대목에 있었다. "신광의 진마이촌에서 건져지는 사철은 앞으로 몽땅 절거리 몫"이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국보 제264호 '영일냉수리신라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가 봤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옥수수밭. 옆으로 잡초 우거진 내가 흐르고 있다.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냇물이다. 앞길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 앞길도 일찍이 냇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냇물 따라 사철이 흘러 닥쳤을 것이다. 그 사철을 건져 말취와 사신지 2인조는 제철을 해 왔는데 "앞으로는 몽땅 절거리 차지가 된다"는 지증왕의 엄명이 떨어진 것이다.

미와야마(三輪山)을 바라보는 자리에 세워진 일본 최대의 무쇠 산문(山門). 일본의 한 제철회사가 만들어 기증한 것이다.

사철 없이 제철를 할 수 없다. 왕명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사철을 캐면 중죄로 다스린다"는 엄명에 말취와 사신지 두 사나이는 신라를 포기하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석은 이 자리에 세워져 있었지요."

냉수 2리의 새마을지도자 김용준씨가 가리키는 옥수수밭은 저녁노을에 불그레 물들어 있었다. 멀리 공포탄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멧돼지 등 야생 짐승들의 밤 출몰을 예방하는 공포탄이라 한다. 신광이 산골임을 일러주는 신호 같아서 일말의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신라 진평왕(眞平王·572~632년) 시대 무려 525년간의 대사찰(大寺刹)을 원효대사로하여금 짓게 한 신광의 융성함은 볼 나위없었다. 지금은 단지 겹 3간의 법광사(法廣寺)가 비학산 기슭의 냇가에 호젓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비학산 기슭을 따라 여전히 냇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다. 폭 5 넘는 꾀 넓은 냇물이다. 저 물 속에 일찍이 숱한 사철이 함께 흘러 신라사람을 흥겹게 했을 것이다. 강변의 옛 사찰 자리는 현재 몽땅 '재정비 수리중'으로 파란 텐트로 앙상하게 덮여 있다. 저 텐트가 언제 다 거둬질 것인지 마냥 답답하다.

신광에서 일본으로 망명(亡命), 신천지를 세운 말취와 사신지의 미와시(三輪市), 그 규모 크기 정도된 매무새가 후련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답답하다. 말취와 사신지의 이름자는 물론 신라에서 온 기술자라는 서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대사서(古代史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단지 '신광조해(神光照海)'라는 글귀로 이들 특수 기술자의 일본 내왕을 반기고 있다. '신의 빛이 바다를 비추고 일본에 왔다'는 것이다.

이 '신광(神光)'이라는 글귀로 두 기술자가 신라의 신광에서 일본으로 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얄미운 씀새가 아닌가. 마을 이름을 '신광'이라 고친 것은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이었다고 한다. 법흥왕은 한밤에 제철하는 불빛이 신령스레 비친다고 하여 '신광(神光)'이라고 마을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책은 이런 사실 자체도 깡그리 기록하지 않고 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한국인의 기세는 지금 신광에 살아 넘치고 있다. 신광면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는 면 주민 축구대회가 그것이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8월15일에 전(全) 주민이 모여 시작한 이 이색 축구대회는 올 8월로 47회를 맞이했다. 이 날만은 온 주민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여 '신광의 기세'를 드날린다고 한다. 우승팀에는 상품으로 돼지 한 마리가 주어진다고 하는데 이 돼지를 마을회관에 가지고 가서 주민이 모두 모여 구워먹으며 잔치를 한다. 즐거운 친목대회가 베풀어지는 것이다.

일찍이신광이 대(大) 제철공장 단지였던 신라 때의 기상과 친목을 엿보여주는 행사 같다. 신광은 요즘 사과생산에 힘쓰고 있다. 주민 축구대회를 주도하는 소설가 손길호(孫吉鎬)씨도 사과생산업에 종사중이다. 품질이 좋은 맛있는 사과와 사과음료 등 신선한 아이디어의 상품이 포항사람들의 식탁을 즐겁게 해줄 것을 빈다. 신광은 일찍이 적송(赤松)의 아름다운 고장이기도 했다. 제철을 하자면 송진으로 화력이 센 붉은 소나무가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관사가 불에 탔을 때 이 적송 송림(松林)도 함께 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법광사 재건과 더불어 적송 가꾸기에도 힘써 주기를 바란다. 신광(神光) 화이팅!

끝으로 희한한 일을 한 가지 소개한다. 신라의 신광에서 일본으로 망명한 2인조 중의 한사람인 말취(우리말 이름은 굳치·제철기술자)의 자손이 최근 나타났다. 신일본제철의 기술부장으로 있다가 현재 제철관련사인 '스가테끄' 사장으로 근무중인 미와타카시(三輪隆)씨가 그 사람이다. 미와씨는 이같은 사실을 일본 잡지 등에 소개하여 화제의 인물로 인기를 모았다. 미와 타카시씨는 현재 57세. 조상도 제철기술자였고 자손도 현재 제철기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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