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간 연오랑은 기비제조 기술자·세오녀는 제철 지휘자

포항시 해병대 사령부 안에 간직된 연오랑·세오녀 자리 '일월지 사적비(日月地 史蹟碑)'.

연오랑이 日 가져간 보물 8종 효고켄 이즈시진쟈에 모시고 연오랑 아내 받든 신사도 있어

日 역사 문건 '고사기' 등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비교적 많이 서술돼 있어

동해 바닷가 즉, 영일만가에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을 때-서기 157년 무렵,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포항의 명소 '일원지(日月地)'. 이 연못은 일찍 연오랑·세오녀가 제철(製鐵)을 하기 위해 호수물로 쓴 자리.

연오랑은 이날 바다에 나가 해초(海藻) 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바위를 타고 온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 생각, 세워서 왕을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바닷가에 나가 본 세오녀는 바위 위에 벗어놓은 남편 신발을 보고 바위에 올랐더니 바위는 세오녀를 태워 일본으로 갔다. 세오녀를 보고 놀란 그 곳 사람들은 왕에게 알려 왕은 세오녀를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는 해와 달의 광채가 사리지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 까닭은 캐묻는 임금에게 일관(日官)이 대답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포항시 도구길 10번지에 세워진 연오랑·세오녀 일월사당(日月祠堂).

왕이 신하를 일본에 보내어, 연오랑을 찾아 신라로 돌아오기를 권했으나, 연오랑은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 즉 세초를 줄 테니, 이 비단을 신라로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고 한다.

비단을 받아 신라로 돌아온 신하가 연오랑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의 정기가 옛날과 같이 빛났다.

따라서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고 국보로 삼았으며,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밝히고 있다.

연오랑 일월사당 대문 앞. 여러해 묵어 자란 소나무가 우렁차다.

이것이 삼국유사에 보이는 '연오랑 세오녀' 기록의 전문(全文)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영일현은 '해맞이 고을'이란 뜻이고, '도기야'의 '도기'는 '달'을 가리키는 옛말이요, '야'는 '들판'을 뜻하는 낱말이다.

원래는 '돋아남'을 가리키는 '돋기'에서 유래됐다 한다. 이 달을 가리킨 '도기'가 '달'을 가리킨 일본말 '츠티'의 원형이었다고 한다.

이날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돌아오다 해조(海藻)를 따고 있었다. 그때 연오랑이 따고 있었던 바닷풀은 모자반이었다. 모자반은 우리나라의 얕은 바다 밑에 많이 자라는 갈색 해초로 식용하기는 하나, 어부도 아니고 당시 신라 왕자(연오랑은 신라 제 4대왕 석탈해의 왕손)이었던 신분으로 모자반을 식용하기 위해 손수 딴 것은 아닐테고, 양력 3월달의 춘분(春分)에 올릴 제사용의 해초를 스스로 따려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효고켄(兵庫縣) 이즈시시(出石市)에 있는 연오랑 기념비 근처. 천일창이 잠시 지낸 주택지.

연오랑은 예(濊)계 왕손이었고, 당시 예계통 사람들은 춘분에 바다풀을 바다의 신에게 올리는 풍습을 지켰고, 연오랑이 일본에 간 다음에도, 춘분날에 모자반 올리기 제사는 올린 것으로 전해져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연오랑 세오녀'이야기는 제목까지 합쳐 모두 243자의 한자로 구성돼 있다. 번역문까지 협쳐도 1페이지반 남짓 분량이다. 비교적 간략한 문건이다.

이에 비기면, 일본 역사 문건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우선 '고사기(古事記)'.

일본 효고켄 이즈시시(出石市)에 있는 히메샤(比賣社). 연오랑이 일본에서 재혼한 아내를 제사 지내고 있는 서낭당.

'신라 국왕(國王)의 아들이었으니 이름은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라 했으니, 이 사람 참도(參渡) 해왔느니라…'로 시작되는 4페이지 분량의 고문(高文)식 일본어로 된 난삽한 글귀. 잔 글씨로 가득히 해설까지 넣어 싣고 있으나, '일본에 온' 것을 '참도(삼가 내왕)'등 낱말로 높이고 기록한 것 등 폄하 의식이 강하다. 연오랑의 이름을 아메노히보코로 바꾸고 폄하하고 있으나, 그가 일본에 와서 낳은 자손들의 이름을 소상히 기록, 그 중의 한 여자 자손이 '일본 역사상 최고의 여성 황후(皇后)로 알려져있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어머니가 되는 여성' 이라고까지 높이고 있다.

연오랑이 일본에 가져간 보물 8종의 이름을 낱낱이 들고도 있다. 이 보물들 8종은, 현재까지 연오랑을 깍듯이 받들고 있는 일본 효고켄(兵庫縣) 이즈시진쟈(出石神社)에서 모시고 있다. 이즈시잔쟈는 연오랑과 그 일족(一族)의 유물을 모시고 있는 서낭당이다.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이 신사 안에는 '비매사(比賣社)'라는 이름의 연오랑의 아내를 받든 신사(神社)도 있는데, 세오녀를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오랑이 일본에서 새장가든 아내 태씨(太氏)를 받들고 있는 서낭당이다. 태씨는 고구려계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일찍이 일본에 나가 살던 이들이었다.

따라서 일본에는 세오녀를 받들고 있는 신사는 없다. 단지 '히매고소(比賣碁曾)'라는 여신의 이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또는 '아카르히메(阿加流姬)'라는 이름의 연오랑의 한국인 애나로서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남편의 횡포를 피해 일본으로 도망쳐 큐슈(九州)의 무나카타(宗像), 히메지마(姬島) 등과 나니와(難波 요즘의 오사카)지역에서는 직조(織造)와 제철신(製鐵神)으로 알려져 있는 여인이다. 큐슈의 무나카타신사에서는 특히 비단을 따는 여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큐슈 동쪽 구니사키반도 끝자락에서 6km더 간 한바다에 보물섬이 하나 있다. '히메지마(姬島)' 즉 '공주의 섬'이란 이름의 아주 작은 보물섬이 있다. 이 섬이 '보물섬' 이라 불리는 까닭은 여기에 자리잡은 산 하나가, 온통 흑요석의 산이라는 데 있다.

흑요석(黑曜石)은 고대에 '오석(烏石)'이라 불린 무기였다. 이 돌산에서 깎아지는 작은 조각조각이 그대로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주는 까닭이다.

흑요석은, 우리나라에는 생산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이 히메지마 외에 또 한군데 작은 산에서 산출될 뿐이다.

따라서 일본 큐슈 외딴 섬에서 생산되는 흑요석이, 그 당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신라로서는 얼마나 큰 산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신라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전쟁을 신라 임금끼리 싸우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과 제 9대 벌휴(伐休)왕과의 싸움이었다.

신라는 삼씨(三氏)의 정권이었다.

초대 박혁거세 왕은 박(朴)씨였고 2대와 3대도 박씨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다 4대에 석탈해왕의 석(昔)씨가 들어섰다. 그리고 5대 6대 7대까지 무난히 박씨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석탈해 왕의 집권은 워낙 뛰어난 정권이었던 탓으로 별 문제 없었으나, 제8대 아달라왕의 팽창정권이 들어서자, 석탈해왕의 뛰어난 자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 중 연오랑 왕자(석탈해왕의 손자)가 일찌감치 철공업(鐵工業)에 손대며 신산업 왕정을 편다. 연오랑의 동생 벌휴도 신산업 왕정에 참여했다. 아달라왕과 연오랑 및 동생 벌휴의 실력파가 대립하는 신라왕통의 긴 싸움이 시작되며, 연오랑 세오녀 내외의 일본행이 실시된다.

연오랑 세오녀는 각기 일본 당의 세력을 흡수 팽창하려고 노력한다. 이들 내외간의 사이가 벌어진 듯 보인것도 그 때문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