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기획- 일제말 강제노역 동원 실상…예천 하리면 율곡리 김형태 옹

▲ 일본 보국대에 끌려갔다 온 김형태(90) 할아버지와 아내 구덕분(88) 할머니는 맨날 싸우신다면서도 옛날에는 "우리 할망구가 제일 이뻤지, 우리 영감이 한 인물했지"라며 70년을 같이살며 서로를 칭찬하고 챙겨주는 잉꼬부부이다.

지난 5일 한국인 강제징용 시설이 포함된 일본 근대산업시설들이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강제노역 사실은 일본 정부 대표단의 발언록과 주석(註釋·footnote)이라는 2단계를 거쳐 등재 결정문(Decision)에 반영됐다.

의장국인 독일의 중재로 강제노역 반영을 위한 주석을 단 결정문 수정안을 마련하고, 이를 위원국 전원의 의견일치로 통과시켰다. 1939년부터 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무려 146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그런데 이같은 명백한 사실을 일본은 아베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까지 나서서 "강제노역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발표한 성명 속 'forced to work' 표현의 해석을 두고도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러한 때에 경북일보는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에 동원돼 고난을 겪은 실제 피해자를 만나 지옥 같았던 강제노역에 대해 그 실상을 들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해. 지금의 군청 자리지 아마. 하리면에서만 11명 예천에서만 200여명이 끌려간 걸로 기억해."

일제 말 1943년, 17살의 어린나이에 일제의 징용에 끌려갔다 온 예천군 하리면 율곡리 김형태(90) 할아버지는 지병과 연세로 인해 어눌한 말투지만 그 당시를 회상하며 지난 얘기들을 들려줬다.

김형태 할아버지의 집은 하리면 율곡리 380번지 하늘아래 첫 동네 같은 곳이다. 미리 전화를 한 후 간 뒤라 집 앞에 서서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서 있는 분이 김형태 할아버지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낡고 초라한 집에 거동도 불편한 노부부는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반가운지 아내 구덕분(88) 할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어서 오라는 반가운 손짓을 해 주었다.

구덕분 할머니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네발로 기어 다녀. 이제는 나이가 먹어서 몸도 성치 않고 다리가 아파"라며 "일본에 강제로 노역을 하러 끌려갔다 오고 6·25전쟁터에도 갔다 온 양반이 우리 영감이야"라며 반겨 주었다.

대청마루에 앉은 김형태 할아버지는 일제 징용에 끌려가 그곳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기후갱이라는 곳으로 끌려가 수력발전소 댐(마리야마)건설에 동원돼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굴을 뚫는 작업을 하다 해방이 돼 돌아왔지"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 쇼와 천왕의 항복 담화문 발표가 있었지. 사람들이 그때 쇼와가 손들었다며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며 만세를 불렀지."

김 할아버지는 "죽을 고생을 하며 오로지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신념 하나로 힘든 일을 참았다"며 "정말 힘든 나날이었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6시까지 작업을 하며 군 막사처럼 천막을 친 곳에 양쪽으로 나눠서 잠을 자고 생활을 했다. 추워서 서로 몸을 꼭 부둥켜안거나 새우잠을 자곤 했지. 그래도 힘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곳이 가장 편한 곳이었다"고 기억을 더듬으며 두 번 다시 회상하기도 싫다는 듯 힘든 표정을 지었다.

이어 "무거운 드릴과 곡괭이로 갱도 막장에서 일을 할 때가 가장 힘이 들었다"며 "찜통같은 좁은 막장 안은 공기가 희박해 숨 쉬는 것도 힘든 생지옥이었다"고 전했다.

"그래도 같이 끌려 온 사람들이 나이가 어리다고 나중에는 막장 작업 중에서 가장 편한 돌을 골라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시켰어. 본인들도 힘들면서, 그게 한국 사람들이야 동생 같은 나를 힘든 일에서 빼 준거지."

김형태 할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을 이어갔다.

"같이 끌려간 예천 사람들은 일본에 도착하면서 뿔뿔이 흩어졌지. 난 그래도 나이가 어리다고 같이 온 분들이 많이 챙겨주고 힘든 일은 안 시키고 옮겨 가는 곳마다 허드렛일만 시켰어.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 부모님도 보고 싶고,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에 처음에는 한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고 했다. 같이 끌려간 하리면의 11명 중 이제 나만 살아남았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부터 김 할아버지는 정부에서 징용자들에 대한 지원으로 연간 80만원을 받고 있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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