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만으로 청춘 기획 못해 얄궂고 힘든 청춘이지만 눈 똑바로 뜨고 걸어가자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이제 이런 노래를 부르기도 안쓰럽다. 젊음은 더 이상 희망의 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젊은이 '답다'라는 말의 알맹이는 패기, 도전정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젊음은 무기력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젊음에게 미안하다. 머리속엔 '파란 낙엽'이 넘실댄다. 아직 새파란데 낙엽이라니. 채 피지도 않은 것이 시들다니. 얄궂다. 심리적 결혼 한계선이 월급 200만원, 그 이하는 자격 미달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 날 맨몸으로 돈 벌어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독립군의 무용담처럼 들릴까.

최근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청춘남을 구분하는 용어가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초식계(草食系)', '절식계(絶食系)', '승려계(僧侶系)'라는 말들이다. 연애나 이성 관계에 서툰 것이 초식계이고, 사귀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것이 절식계이다. 나아가 성(性)·섹스 자체를 초탈한 것이 승려계이다. 승려계는 열반계라 불러도 되겠다. 이들은 외친다. '내 취미 생활도 바쁘다!'. 그러니 연애도 섹스도 아예 물 건너간 것이다. 아이를 낳을 인연이 끊겼으니 무슨 출산과 인구 증가랴. 이 바람이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불어오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경제적 사정 즉 돈이 없기 때문이다. 청춘들의 현실 전망은 결혼이 밥 먹여주지 않고 아이가 자신들의 삶을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혼자 사는 즐거움을 꿈꾸기도 어려운데, 가족이라니' 행복한 싱글라이프를 택하지, 더 이상 가족 따위는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사태는 심각하다. 사실 돈이 없으면 패기, 도전정신만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 그렇다고 돈만으로 모든 것이 대체되는 것도 아니다.

젊음을 높게 평가한 것은 근대기나 고도 성장기였다. 그들은 산업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자 국가성장의 동력이었다. 그때는 노인이 아니라 청년이 사회의 표상이었다. 그들은 생산과 소비를 이끄는 주체였고 가정과 사회의 희망이었다. 그래서 '젊음=희망'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청년들에게 거는 희망과 기대는 1990년대에도 살아 남아 있었다. 1997년, 김병수와 박성준으로 구성된 듀엣 벅(Buck)이 불렀던 노래 '맨발의 청춘'을 들어보라.

'이렇다 할 빽도 비전도 지금 당장은 없고/ 젊은 것 빼면 시체지만 난 꿈이 있어./먼 훗날 내 덕에 호강할 너의 모습 그려 봐/밑져야 본전 아니겠니. 니 인생 걸어보렴/용하다는 도사 그렇게 열나게 찾아다닐 것 없어/두고 봐 이제부터 모든 게 원대로 뜻대로 맘대로/잘 풀릴 걸 속는 셈치고 날 믿고 따라 줘/니가 보는 지금의 나의 모습 그게 전부는 아니야/멀지 않아 열릴 거야 나의 전성시대/…/갈 길이 멀기에 서글픈 나는 지금 맨발의 청춘/나 하지만 여기서 멈추진 않을 거야 간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힘이 솟는다. '청춘은 꿈이요 꿈은 봄 나라'라는 지난 시절의 노래처럼, 야심이 살아있다.

돈 만으로 청춘을 기획할 수는 없다. 청춘의 전망속에 돈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늘 우리를 아프게 한다. 상처 입힌다. 허리가 아프다고 잘라낼 수 없듯, 힘 든다고 꿈을 파기할 수는 없다. 청춘이여 얄궂지만 눈 똑바로 뜨고 걸어가자. 밑져야 본전이니,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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