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공군 오폭으로 울룽도 어민 150명 사망 증언…본사 탐사팀 발견 비석 조사 중

▲ 경북일보 수중 탐사팀은 최근 독도 동도와 서도 사이 수중에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 적힌 비석을 발견했다. 발견 당시 이 비석은 암반과 몽돌에 가려져 있었고 진주배말(따개비), 고동 등이 달라 붙어 있었다. 조준호기자 cjh@kyongbuk.com

광복 70주년과 경북일보 창간 25주년을 맞아 독도 수중 생태를 조사 하던 독도탐사팀의 눈에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 조난 어민 위령비)'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됐다.

발견된 비석이 지난 50년 독도에 가장 먼저 세워진 비(碑)인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靈碑)가 맞는지는 인양을 해 봐야 알겠지만 만일 이 비석이 사라진 위령비로 밝혀질 경우 독도의 아픈 역사가 바다속에서 약 60여년간 수장돼 있었던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경북일보는 독도 수중에서 발견된 비석을 관계당국과 협의를 거쳐 인양 조사 등 비가 세워진 과정을 되짚어 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키로 했다.


△ 미국 극동함대 폭격·총격 사건

지난 1948년 6월 8일 화요일 오전 11시 30분경 화창한 초여름 날씨 속에서 울릉도와 강원도 어선 18척에 승선하고있던 59명의 순박한 어부들이 미역과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중 먼하늘에서 굉음을 내며 독도로 접근하는 한무리의 비행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 비행기들은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손을 흔드는 우리 어부들의 머리위로 폭탄과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부들에게 폭탄과 총격을 가한 비행기들은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소속으로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29기 9대로 이 비행기 무리들의 4차례에 걸친 폭격과 총격으로 14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는 끔짝한사고가 발생 했다.

당시 독도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제1778호(1947. 9. 16)에 의해 주일 미 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돼 있었다.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다음날인 6월 9일 독도로 조업을 나온 어민들에게 구조된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의 목격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사고 소식을 접한 울릉경찰서는 독도 현지로 구조선을 급파 나머지 생존자 파악과 2명의 사체를 수습하였는데 그 후 폭격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정부는 울릉도 어민 1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어선 20여 척이 파괴됐다고 확인됐으나,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어부는 "30여 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승선했으므로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1950년 조재천 前 경상북도 도지사가 독도 동도 몽돌해변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설치한 재막식 때 모습.
△ 독도 조난 위령비

독도에 최초로 세워진 비(碑)다. 지난 1950년 6월 8일 오전 10시 독도 동도 몽돌 해변에서는 비(碑)의 제막식이 진행됐다.

위령제와 제막식은 당시 경상북도 지사인 조재천(曺在千·1970년 사망)씨가 희생된 어민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울릉도 주민들과 유가족, 관계공무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하고 제막식과 위령제를 진행했다.

건립된 비(碑)의 전면에는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는 9자의 글귀가 새겨 졌으며 비의 좌측면에는 大韓民國 慶尙北道 知事 曺在千 贈(대한민국 경상북도 지사 조채천 증)이라는 14자가 새겨졌다.

우측면과 뒤면은 아직까지 자세히 확인된 바가 없지만 지난 2005년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曺惠子·63) 씨가 이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40여 년간 보관해 온 사진첩을 공개하면서 비문이 알려졌다.

당시 경북도지사였던 조재천(曺在千) 씨가 이 전 대통령에게 보낸 '울릉도 도민 위문, 독도위령비 건립기록'이라는 제목의 사진첩속에서 '이 비(碑)의 건립 의도는 위령(慰靈) 이외에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함에 대해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재천명하는 데 있다'라고 확인된 것이 전부로 실물은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러나, 희생된 어민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독도에 최초로 세워진 비가 어느순간 사라졌다.

일설에 의하면 6·25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독도에 상륙해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독도에 세우는 등 계속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는데 그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파괴됐다고도 하고, 다른 이야기는 태풍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한다.

▲ 1953년으로 추정되는 독도위령비와 일본인이 무단으로 설치한 것을 뽑아 낸 일본영토 팻말.
△재건립된 독도 조난 위령비

지난 1950년 최초로 독도에 세워진 비가 없어진 자리에는 지금은 재건립된 비가 희생된 어민들의 원혼을 달래고 있다.

재 건립된 비는 위령비는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재건립되었는데 화강석 좌대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좌대 정면에 위령비 건립 취지문이 적혀 있고, 비신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靈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지난 2005년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40여 년간 보관해온 사진첩을 공개한 이후 이의근 전 경상북도 지사가 이 사진첩을 참고 위령비를 재건립 했다.

▲ 2005년 이의근 경상북도 도지사가 다시 설치한 독도조난어민위령비.
△독도 수중에서 발견된 독도 조난 위령비

경북일보 독도 탐사팀이 독도 인근 해역 수중에서 발견한 비석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1950년에 설치된 최초의 위령비와 2005년에 재건립된 위령비 외에는 다른 비석이 설치된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이에 경북일보는 독도 역사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독도 수중에 잠자고 있는 위령비를 인양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만일, 이 비석이 지난 1950년 최초로 세워진 비가 맞을 경우에는 60여년간 바다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고귀한 어민들의 원혼이 비석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질 정도다.

지금부터라도 조난(遭難) 이 아닌 독도폭격희생어민위령비로 바꾸라는 원혼들의 죽음을 이제는 바로 잡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조치를 취할 수는 없지만 독도행정의 최일선 관청인 울릉군이라도 계획을 세워서 경상북도, 정부와 힘을 합쳐 지금부터라도 억울하게 희생된 어민들이 조난 이 아닌 포격희생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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