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박물관 개관 당시 중앙에 안경을 낀 이종학 관장. 이 관장 좌측에는 울릉군의장이었던 현 최수일 군수.

울릉도에는 국내 첫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이 있다. 울릉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지어 헌납, 1997년 8월 8일 개관했다.

입구에는 한자와 한글로 된 '독도박물관'이라는 큼지막한 글이 아로 새겨진 비석이 있다.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사운 이종학 관장(1927~2002)이 사재를 털어 제작한 것이다.

비석의 한글체는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에서, 한문체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집자했다.

한·일간 영토분쟁의 중심에 있는 독도를 지키고 싶은 염원을 담아 일본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준 이순신 장군이 독도를 지켜 줄것을 바라는 뜻을 담았다.

독도에 관심이 많은 국민들 중 독도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를 꼽으라면 울릉주민 고 최종덕씨와 이종학 초대 독도박물관장을 많이들 이야기한다.

독도박물관 머릿돌 비석을 만든 이 관장의 삶의 흔적을 둘러보면 독도에 대한 애증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단연컨대 우리나라 학자들 중 독도의 자료를 가장 많이 발굴하고 축적한 이다.

▲ 한일관계 사료발굴에 대한 기자 회견 중인 이종학 관장.


독도박물관 개관당시 그가 30년 동안 모운 갖가지 독도자료 351종(512점)을 기증했다. 또, 재임기간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가 무려 1천300점에 달한다.

대부분 발품팔고 사비로 모은 독도사료였다.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역사적 대응을 국민들에게 보다 쉽게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해 50여 차례 일본을 방문, 중요자료를 수집했다.

이 관장은 지난 1927년 10월 1일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에서 태어나 서지학자로, 역사 수집가, 역사지킴이 등으로 정열적인 삶을 살다가 2002년 76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생전 발굴한 사료는 방대했다.

평생 동안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독립기념관(3천300여점), 동학혁명기념관(400여점), 현충사(800여점), 전주역사박물관(29점), 수원시 문화원(228점) 등에 기증했다. 또 그가 타계 후 가족들은 그가 남긴 자료 2만여점을 수원박물관에 기증했다.

생전 '죽어 한 줌 재 돼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라는 좌우명 처럼 독도에 대한 무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를 실행했다.

그의 업적을 크게 분류하면 독도 및 조선해(동해) 자료수집 그리고 이순신 및 거북선 등에 얽힌 자료 수집, 수원성의 옛 이름 화성을 찾고 유네스코 등재 등으로 꼽는다.

또, 그는 우리 땅 간도에 대한 자료도 모았다. 비단 간도 뿐 아니라 일제강제 병합자료 등을 모아 이와 관련된 문제를 남북 공동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북한에 자료기증과 공동전시회 등도 추진했다.

그리고, 1990년 후반에서 2000년 초기 독도박물관장 등으로 근무 할 때 '한일어업관계조사자료', '한일통어지침', '조선통어사정', '일본의 독도정책 자료집', '1910년 한국강점자료집' 등 과 독도와 동해 등이 포함된 한·일관계사 관련 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한일 관계 및 독도연구 등에 바탕이 된 자료를 발굴, 정리했다.

이런 업적은 그가 세상을 등지고 난 2003년 5월 30일 '제 8회 바다의 날'을 맞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생 동안 수집한 역사자료를 독도박물관 등 국가기관에 기증하고 우리나라를 세계에 널리 알린 정신을 계승키 위해 '무궁화장' 국민훈장을 추서(追敍)했다.

서지학자이자 독도 지킴이로 평생을 살았던 이 관장의 호는 사운(史芸)이었다.

"역사가 천만년 누릴 정신의 옥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야 한다"며 '역사를 김매기 한다'는 뜻에서 호를 '사운(史芸)'으로 짓고 일본이 왜곡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영토를 지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생전 평생 동안 가장 기쁜 일은 두가지라 했다. "하나는 1945년 조국 광복이었고, 두 번째는 1990년 7월 2일 일본 시마네현 담당자를 만나자리에서 독도는 물론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항복을 받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일본 시마네현 지사를 대신해 만난 시마네현 총무과 독도 담당자인 가네시쿠는 독도문제로 이야기 도중 학술적, 자료를 인용한 이 관장의 논리에 밀렸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 관장은 일본의 도서관 및 고문헌 수집상 등을 자주 만났다. 그들은 이 관장을 보고 '다케시마'가 왔다고 하며 모두들 알아 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도 인정 할 정도로 독도인의 삶을 살았는 듯하다.

2000년 5월 25일 이 관장은 독도박물관장직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이런 행보에 의아해 하며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지자체인 시마네현을 방문한 독도박물관 고 이종학 초대관장. 일본의 대응을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키 위해 자주 일본을 방문했다. 수원 광교박물관 제공


그는 정부가 챙겨야 할 독도를 챙기지 않고, 자료를 발굴해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일본의 조직적인 대응에 비해 무대응으로 일관과 정부의 독도정책에 대한 불만, 항의 표시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독도박물관 운영경비 또한 초미니 지자체인 울릉군이 떠맡아 했던 시절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그의 고민이 컸는 것도 지인들은 이야기 했다.

더욱이 어렵사리 독도에 자료를 발굴해도 정부의 무관심과 이와 반대로 일본에서는 찾아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등 상반된 입장을 보며 결심한 듯하다.

그가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2008년부터 독도박물관의 운영비 일부를 정부 등에 지원 받게 됐다.

이 관장의 독도에 대한 관심은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됐다. 역사자료를 수집하 던 중 충무공의 평가가 상당수 잘 못 됐는 것을 발견했다.

충무공의 자료 수집 중 자연스럽게 일본자료 등을 비교, 분석했다. 이때 독도 관련한 자료를 접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허구가 진실로 바뀌는 것을 보며 독도를 지키자는 마음을 먹고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삶은 한편으로 보면 당대 평가보다 후대에 재조명 되는 삶이다. 정통코스인 서지학자라 아니었고, 발품을 팔고 사비로 자료를 모아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는 모습 등이 기존 제도권 학자들이나 다른 시각에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0년 5월 독도관장이라는 명함을 던지고 사운연구소에서 자료를 발굴하고 정부도 하지 못한 자료를 정리, 편집하는 등 백의종군의 삶을 보냈다.

지금 그의 흔적은 초대관장을 지낸 독도박물관 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수원박물관, 수원 광교박물관 등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 독도박물관 입구에 이종학 관장이 사비를 들여 만든 머릿돌.


수원박물관은 지난 2012년 이 관장 타계 10주기를 맞아 일본과 독도영유권 역사 전쟁 속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사운 이종학의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특별기획전도 열며 그를 추모했다.

울릉주민이며 어부인 고 최종덕씨가 독도에서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면 사운 이종학 관장은 독도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흩어져 있는 독도 자료를 발굴해 재정립하고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 이다.

울릉군민들은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독도를 바라보고 있는 독도박물관 한켠에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독도박물관은 전시 된 독도관련 자료 수집에 매진한 이 관장의 삶을 조명해보는 것도 독도를 알리는 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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