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스토리] 사람이다 문화다- 포항 호미곶면 열부(烈夫) 이태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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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식씨가 병석에 누운 아내를 위해 30여 년간 통상 주부들이하는 일까지도 도맡아 하고 있다. 유홍근 기자

조선시대에 '할고(割股)'라는 지극한 정성의 상징적인 행위가 있었다.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 몸져누운 아비나 지아비의 병환을 낫게 하는데 썼다는 얘기다. 이는 효자, 열녀(烈女)들의 최후, 최고의 덕행이었다.

이 같은 덕행을 한 효자나 열부가 난 마을 앞에는 붉은 문(紅門)을 세워 효와 덕행이 후대에 모범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행위는 이 시대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사회관습에 얽매인 일종의 강요된 과잉효행 정도로 비친다.  

옛날부터 '긴 병에 효자 없다'했고, '열녀는 있어도 열부(烈夫)는 없다'고 했는데 이 닳아빠진 시대에 이 두 가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일을 해 내고 있는 사람이 연오랑 세오녀의 고장 호미곶에 살고 있다.  

이태식(李泰植 ·76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강사 2리)할아버지. 그는 병석에 누운 아내를 30여 년간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 온 부부애의 표상이다.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다. 그를 '일월의 땅 열부(烈夫) 이태식'으로 부르고 싶다. 

열부 이태식씨가 사는 동네는 동해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반농반어의 작은 마을이다. 소잔등 같은 언덕배기에 따개비처럼 나지막한 집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가 아내를 돌보면서 하는 일은 한 해 식량이 될 만한 논농사를 짓는 일이다. 700평 정도의 논에서는 40㎏ 들이 가마니 30부대 정도의 나락 소출이 난다. 이렇게 보면 그를 농사꾼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지금은 특별한 직업 없이 아내를 돌보며 사는 것이 일과이자 천직이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어서라기보다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그의 생활은 아주 심하게 가지치기 된 나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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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식씨가 30여 년간 병석에 누운 아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다. 유홍근 기자

열부 이태식씨의 하루는 단순하다. 동해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기도 전인 새벽 4시께 벌써 눈이 떠지면 그는 조용히 몸을 뒤척인다.

혹시라도 아내가 깰까봐 조용히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한다. 아침 준비래야 별것도 아이다. 별것 아닌 식사 준비라지만 그는 아내를 위한 상차리기에 정성이 흐트러진 적이 없다.

아내가 누워서 소화를 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밥을 짓고, 그 밥을 믹서에 갈아 미음처럼 마실 수 있게 하거나 숟가락으로 떠서 먹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의 조리법이 동원된다. 밥은 물론 라면도 갈고, 어떤 때는 건빵도 갈아서 준비한다. 

그의 아내 이름은 정순자(鄭順子·72). 강사리에서 남쪽 구룡포 쪽의 마을인 삼정 3동이 고향이다. 곁 마을이자 이태식씨의 고모부가 살고 있던 동네다.

열부 이태식과 정순자는 동네를 오가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만났을 것이란 어림짐작과는 달리 중매로 만났다. 어릴 때 고모 집에 자주 놀러 다녔기 때문에 고모의 중매로 둘은 만나게 됐다.  

중매로 만나기는 했지만 숙맥인 청년 이태식은 선뜻 결혼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가끔씩 만나서 서로의 정을 쌓아갔다. 그렇게 1년 넘게 2년 가까이 친구처럼 지냈다.

자주 만났지만 그들은 손도 잡지 않았다. 속으로 안달이 났던 정순자씨가 혼례식을 올리고 나중에야 "어떻게 손도 한 번 잡지 않았느냐"고 채근하듯 물었더니 "손잡으면 다른 생각이 들까봐 잡지 않았다"고 신랑이 대답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를 끔찍하게도 지켜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누워 있는 할머니가 이런 지난 얘기를 하는 동안 이태식 할아버지는 회상하듯 입가에 엷은 미소만 지을 뿐 별말이 없다.

청년 이태식이 어느 날 용기를 내 넌지시 결혼하자고 아가씨 정순자에게 물었더니 "알아서 해라"며 배시시 몸을 꼬았다고 한다. 싱거운 경상도식 사랑 표현이지만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은 이미 통했던 것이다. 

누워 있는 정순자씨는 당시 처음 이태식씨를 만났을 때 "저 사람이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요새말로 "한눈에 뿅 갔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66년 결혼한 이태식·정순자 부부는 3형제 아이들이 날 때까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단란한 행복한 가정이었다. 마을에서 잉꼬부부로 불릴 만큼 사랑스런 부부였다.

건강했던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은 열심히 일했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업의 전부인 이태식씨는 건축 현장의 막노동에서부터 험한 공장 작업장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려가지 일을 했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이들 부부에게 천형 같은 시련이 시작됐다. 아내 정순자씨가 '새댁'으로 불리던 30대 중반 청상의 꽃다운 나이에 다리에서부터 허리까지, 허리에서 가슴 아래까지 서서히 굳어지는 병을 앓게 된 것이다.

멀쩡하던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해 병원을 찾아갔더니 류마티스관절염이라 했다. 아내 정순자씨는 병이 나기 전에는 누구보다 건강했다. 하지만 발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설 수 없게 됐고, 이곳저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돈이라도 넉넉했으면 대처의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보았을 테지만 먹고살기 힘든 처지에서 억센 병마를 잡을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가 일 년이 되고 3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30년이 됐다. 올해로 정순자씨가 병석에 몸져누운 지 35년째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진통제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병원 권유대로 아스피린을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야 했다. 한 때는 정신을 잃은 적도 있다. 119 앰뷸런스에 실려가 병원에서야 정신이 들기도 했다. 보름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는 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정순자씨가 온갖 고통을 다 견디며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이태식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다. 

"기자분요. 우리 남편 같은 분 세상에 없을 것이니더. 내가 너무 너무 고생 마이 시켰지만 병든 그날부터 이날 이때까지 변함없이 똑같이 대해 주니더"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울먹이며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말을 했다.

할머니는 또 "아이들이 10살, 11살 때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이고 입힐 것도 못 입혀 한이 되고, 아이들 돌보랴, 농사지으랴, 돈 벌이 하랴, 이 못난 사람 간호하랴 1인 몇 역을 해낸 남편이 너무너무 고맙고 불쌍하니더"하며 또 울먹인다.  

백발노인이 된 지금도 "섭(큰아들 이름)이 아베요. 등 지그럽니더(가렵습니다), 오줌 누럽심더" 하면 언제든지 군말 없이 퍼뜩 달려오신다고 한다.  

정순자 할머니는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시능교?"하시더니 옛날처럼 당신 손으로 손수 정성껏 밥상을 차려서 남편에게 드리는 것이라 한다.

또 한 가지는 두 발로 걸어서 아들네 집에 가서 어떻게 사는 지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는 가만히 누워서 이런저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고 또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지워간다고 했다. 

이런 할머니 곁에는 항상 그의 남편 이태식씨가 있다. 그는 종철(종합제철·옛날 지역민들이 포스코를 부르는 이름)이 처음 들어설 때 기계장치를 하는 현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축양장에서 양어장 관리도 하는 등 수많은 일터를 전전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돌 볼 수 있는 일자리를 찾다보니 결국 좋은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기 일쑤였다. 

마을 앞 평상에 둘러 앉아 과메기를 찢어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동네 주민들에게 이태식씨를 취재 나왔다고 했더니 둘러 앉아 있던 네 사람이 누가 시킨 것처럼 동시에 박수를 치면서 "아이고 잘 왔심더" 손을 잡으며 합창이다. 젊을 때 축양장에서 같이 일을 했다는 이름이 같은 김태식씨(66)는 "그 사람 일자리를 찾을 때도 아내 끼니를 챙겨 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찾았심더. 젊었을 때는 술도 한 잔씩 했는데 아내를 생각해서 언제나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지요. 열부시더, 열부"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내 같았으면 술 묵고 마 벌써 달아나 버렸을 낌더. 사랑이라는 말로도 모자랍니더. 상을 받아도 벌써 상을 받아야 했는데…열부문이라도 세워야 할끼시더"라고 동네에 이런 사람이 있어서 자랑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6년 전부터 요양관리를 오고 있는 이영예씨는 "할아버지는 항상 변함없이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를 대한다"면서 "배울 점이 너무 많고, 그 어떤 말로도 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할머니 머리하고 몸은 할아버지의 몸으로 사신다(팔과 손, 머리 부분만 일부 움직이고 몸은 굳어 있어서)"면서 지금도 할아버지가 잠깐 출타할 때는 "일찍 오시소. 빨리 오이소"하며 여느 부부처럼 다정하시다고 한다.  

"한참을 헤아려 보아야 꼽을 수 있을 만큼 오랜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한 가정의 가장으로, 또 어머니의 역할까지 감당하시면서 우리 삼형제를 키워내셨고,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하고 계신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또 한없…" 이태식 할아버지는 칠순 때 큰아들이 쓴 편지를 읽다가 차마 다 읽어 내리지 못하고 한 참을 투박한 손으로 눈과 이마를 가린 채 울먹였다.  

열부 이태식과 아내 정순자씨와의 관계는 운명이나 사랑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 말은 너무 흔하거나 호들갑스러운 말이다.

그의 지극하고 숭고한 정성은 숙명(宿命)이나 소명(召命), 또는 '생(生)의 외경(畏敬)'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동욱 편집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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