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동해안 1천리를 가다] 부조장~여천장~죽도시장 명맥 이어진 상업 네트워크 활발

▲ 제산터널 밑 형산강 어귀에 상부조장터가 1890년대 번성했었다.
포항은 옛부터 철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근대들어 정부 및 지자체 등의 동해 경계가 서로 다른 가운데 포항은 동해 남부지역 부산과 울산을 제외하면 동해 중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해양도시로 성장했다.

포항경제는 철강산업과 물류산업이 발전의 중추다. 모두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붐이 일고 시작된 산업 같지만 이전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필연일 듯하다.

포항 인근지역에서 아직까지 구석기(舊石器) 유적지나 신석기(新石器) 유적 등이 공식적으로 발굴되지 않아 당시 삶의 형태가 규명되지 않았지만 영일만 바닷가와 형산강(兄山江)을 끼고 있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포항은 역사 속에서 삼한시대 진한 12족 중 근기국이 현재 포항의 연일, 오천 등에서 독립적으로 소규모 국가를 형성했다가 삼국시대 때는 경주권으로 통일신라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도시로 신라를 잉태한 지역이다.

포항의 신광 등에서 발상한 철기 제조술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일본까지 전수한 철의 고장이다.

포항이란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치 않지만 대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형산강의 하류이자 지류로서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칠성강의 중요 지점을 나타내는 우리말 지명인 갯메기(갯미기:표준말은 갯목)의 한자화로 이뤄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시대 와서는 포항은 물류유통과 해상방어기지로 자리 잡는다. 조선조정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포항창진을 두었다.

이전 형산강 북하구의 포항리가 조운과 물화교역의 요충지로서 주목을 받다가 국가에서 포항창진을 두어 흉년이 들면 함경북도지방의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때로는 여타 지방의 백성진휼(賑恤)의 운송을 담당하는 전국 굴지의 제민창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인구가 유입됐다.

민간에서는 형산강 중심으로 상부조, 하부조 장터가 들어선다. 조선후기와 구한말 때 남한 3대 시장(서해 강경장, 남해 마산장, 동해 부조장)의 한 곳으로 명성을 떨쳤다. 부조시장의 주역들인 보부상단(褓負商團)이 모여 전국적으로 물류를 집·하역, 배송시킨 지역이다.

형산강 부조장터에는 멀리 서해서부터 남해지역의 주민들과 동해의 끝 섬 독도, 울릉도 인근에서 잡은 수산물 등도 거래됐다. 또 동해 북부 함경도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조장터에서 거래된 물류는 작은 황포돛대를 이용해 서라벌과 또, 금호강을 이용해 달구벌, 낙동강을 이용해 안동, 상주 등 경북북부지방까지 어어졌다.

내륙의 농산물과 바다의 해산물 등이 모두 모인 동해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형산강을 중심으로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지역에 '상부조(윗부조)', 현재의 포항시 연일읍 중명리 지역에 '하부조(아랫부조)'가 형성됐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된 영일현 지역 지도에도 표기돼 있다.

그 자리를 증명하듯 포항에서 경주방면의 구도로 제산터널 밑 커브길에서 가파르게 이어진 산쪽으로 약 20여m를 올라가면 '김이형 유공비'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주변에는 기왓장을 비롯해 옹기조각 등이 널브러져 있다.

당시를 돌이켜 상상해봤다. 지금보다 깊고 넓은 형산강 강폭 주변으로 형성된 주막을 비롯해 객주 등은 정말 장관일듯하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꾸며 놓으면 많은 이들이 찾고 영화 및 방송사 등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좌상대도접장인 김이형 유공비는 1864년(고종4년) 10월에 세워진 비석으로, 당시 부상의 여러 접장 중 대표자로서 부보상·보부상을 지휘한 책임자인 김이형의 행적을 기리는 비다.
▲ 아랫부조를 가리키는 비석.

비석 글귀중의 좌상대는 좌단이라고도 하는 부상을, 우상대는 우단이라고 하는 보상을 말한다. 이들을 통틀어 흔히 보부상이라 일컫고 지금으로 말하면 상인대표였다.

하부조장터에 있는 또 다른 비석은 부조장의 융성에 기여했던 당시 현감을 기리는 선정비가 있다. 이들 비석들은 과거 부조장의 성쇠를 알려주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하부조에 있는 비석은 포항시가 정비했지만 상부조의 비석은 방치돼 있어 아쉽다. 경주시가 좀 더 관심을 보였으면 좋겠다.

원래 경주지역 형산강 하류변에 자리잡은 윗부조장이 먼저 개시됐다. 5일과 10일에 개시하는 장으로 부조장 또는 연화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후 점차 상권이 커지자 배를 정박하고 장터면적이 큰 영일현 지역의 형산강 포구에 아랫부조장을 다시 열었다. 부조장이 흥했던 이유는 선박접안은 물론 포항·경주·영천을 잇는 길목에 위치해 대시장이 형성될 모든 조건을 갖췄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780년부터 1905년까지 황금기를 맞으며 함경도 명태, 강원도·울릉도의 오징어, 포항 청어·소금 등 해안지방 특산물과 경상도에서 생산된 내륙지방 농산물을 교역 넓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대시장이 들어서자 중명리 주변의 형산강 유역에는 수많은 황포돛배와 객주, 여각은 물론 창고업, 위탁판매업, 숙박업이 번성하면서 조선 3대 시장의 반열에 올라선다. 하지만 부조장은 1920년대 와서 죽도동을 비롯해 형산강제방축조공사와 남빈동 매립 등 개발사업으로 인해 쇠퇴기를 맞았다.

포항항을 중심으로 수십년간 진행된 각종 공사와 선박의 접안시설, 마을어구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이 축조되면서 포항장과 여천장은 그 접경지역으로서 더욱 활성화되어 1920년대까지 선박출입으로 번성하던 부조시장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이 고장의 상권을 주도했다.
▲ 제산터널 밑 형산강 어귀에 커브길에서 가파르게 이어진 산쪽으로 약 20여m를 올라가면 '김이형 유공비'가 있다. 주위에 기왓장 등이 널브러져 있다.

이후 1940년 관의 주도로 포항정기시장(1·4·6·9일 개시)을 마련, 시행했다. 그러나 잘못된 위치 선정 때문에 주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포항장과 여천장의 명맥을 잇지 못하며 상권이 쇠퇴했다. 하지만 포항장의 전신인 부조장은 광복을 지나 6·25전쟁 후 죽도시장의 이름으로 그 명성을 되찾게 된다.

포항 부조장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조선 조정도 등한시했던 해양을 이용해 민간에서 상업적으로 해양네트워크를 활성화 시켰다는 것이다.

부조장이 융성하던 시기 조선조정은 울릉도 및 독도를 수토했다. 재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상당수 전라도민들이 울릉도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전라도민들은 나선이라는 배를 이용해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을 했다. 이들은 멀리 황해도 의주까지 가서 쌀을 사다가 울진, 강릉, 원산까지 가서 그 쌀을 팔고 수익을 얻었다.

쌀을 팔고 울릉도에 들러 가지고 간 헌배 대신에 새배를 건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독도에서 강치를 잡는 등 어로활동을 했다는 것이 당시 울릉도, 독도에 갔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이들의 상업적인 거래는 당시 포항 부조장터 등 시장경제를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포항은 영일만이 만들어주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항구의 발달 등으로 인해, 울릉도 재개척이래 한반도 본토와 울릉도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포항장과 죽도시장의 번성기에는 포항의 이웃인 울릉도가 있다.

울릉도는 사실 이전 포항시보다 행정구역상 상위였다. 포항이 현이나 읍으로 승격될 때 울릉군은 군으로, 일제시대는 도로 승격됐다. 1914년 3월 1일 포항리가 포항면으로 승격되고 이곳에 영일군청을 두었지만 울릉군은 1900년에 벌써 군으로 승격됐고, 1915년 울도로 칭하며 제주도와 함께 도로 승격해 도감을 두어 통치케 했다.

울릉도는 그만큼 유동인구도 많았지만 일제시대 동해의 중심에서 수산물을 비롯한 목재 등 수탈가치가 컸던 듯하다.

그 예로 울릉도는 전복을 비롯해 청어, 고등어 등의 통조림가공 공장 등이 있었으며 부산과 포항, 일본을 이어주는 뱃길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 포항과 울릉도를 이어주는 '천양환호'와 '청룡호', '동해호' 등은 죽도시장 번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징어 성어기 때 울릉도 인구는 포항의 인구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의 의·식·주에 필요한 물류 대부분이 죽도시장을 통해 울릉도로 이동했고, 울릉도 오징어와 산채 등은 또 죽도시장을 거쳐 판매됐다.

당시 울릉도 여객선터미널이 있던 동빈동은 울릉주민들을 위한 식당을 비롯한 숙소 등 상권이 갖춰졌다. 아직도 포항 죽도시장 인근의 '대궁장 모텔' 주변은 울릉도 사람들의 중요한 이동동선이기도 하며 약속의 장소이다.

갈수록 노골화되는 일본의 영토야욕으로 독도가 언론에 주목받자 타 지자체 등에서는 울릉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독도홍보 등을 성대하게 개최하는 곳이 많다.

사실 울릉도 주민들과 함께 생활을 같이하고 호흡한 것은 포항시다. 그리고 포항 부조장터는 동해의 끝섬 독도까지 상업 활동을 범위에 넣었다는 현실적 증거다. 울릉도 주민이나 거문도 주민이 부조장에서 분명 독도에서 잡은 강치(바다사자)피나 수산물, 독도나무로 만든 목제품을 부조장터에서 거래했을 것이다.
▲ 1960대 포항-울릉 간을 이어준 동해호. 당시 죽도시장 등을 이용한 상업 활동의 전성기였다.

지난해 포항시는 연일읍 형산강둔치에서 8회째 맞는 '부조장터문화축제'를 개최했다. 매년 축제 때 형산강에서 황포돛배가 떠다니는 모습을 재현한다. 형산강에서 울릉도 '강꼬(울릉도 토속 선박)'와 거문도 '나선' 등이 함께 떠다니는 모습이 진정 동해를 물류 중심지 였던 포항의 진정한 부조장터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업의 힘이 독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동해를 활용한 해양네트워크를 만들었다면 포항 부조장터는 혼란한 시기 독도를 지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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