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종가 전경
△소통과 화합을 실천해 온 상주의 대표 명문가 우복종가(愚伏宗家)

17세기 영남학파 전통을 잇는 학자이자 관료인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불통의 시대를 사는 지금 학문과 경계를 넘나들던 정경세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되는 이유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외서면 우산리 우복종가를 찾아가면 산천과 어우러진 독가촌 우복종가를 만나는데 정경세는 임진왜란 이후 관직을 버리고 외서면 우산리에 조그만 정자와 살림집을 지었다.

영조 26년,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영조가 사폐지로 하사한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땅에 5세손인 정주원(鄭胄源)이‘우산동천(愚山洞天)’으로 이름 짓고 지금까지 24대를 이어오고 있다.

사랑채인 산수헌(山水軒)에 오르면 우산팔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우복가문’이라는 이름을 남기다.

강(姜)씨, 하(河)씨와 더불어‘진양 3성(晉陽 三姓)’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진양 정씨, 진양 정씨가 상주로 터를 잡은 것은 고려후기인 14세기 중엽 정경세의 8대조인 정의생(鄭義生, 判事府使)부터다.

이후 현손 정 번이 율리로 옮겨 살면서 문풍이 크게 일어 집안에 선비가 가득했고 입향 9세대인 정경세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관료로 이름을 드높인 것이다.

이황의 퇴계학은 16세기 이후 영남지역 선비들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고 지식과 정보의 소통을 이끌었던 키워드다.

정경세는 18세의 나이로 1580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류성룡을 만나 퇴계학을 접한 후 30년동안 끈끈한 사제관계를 지속한다.

류성룡이 퇴계연보를 편찬할 때 도왔을 뿐만 아니라 도남서원 건립 시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는 등 퇴계학의 우뚝한 줄기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정경세 직계 종통에서만 문과 합격자가 4명에다 생원진사시 입격자가 다수 배출됐고 정도응, 정종로 등 대대로 문집을 남기면서 영남 굴지의 명가로 도약하자 사림사회에서 이들을‘우복가문’이라 불렀다.

아들 정 심은 예문관 검열, 손자 정도응은 산림처사로 학문에 정진했고 학자로서 그를 빼닮은 6대손 정종로(대산 이상정 문인)와 관료로서 그의 삶을 이어나간 11대손 정의묵 등은 손꼽히는 자손들이다.



△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정경세는 상주 율리에서 태어나 24세 되던 해에 알성문과에 급제해 서울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는 1633년 정 2품 정헌대부의 직함을 지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약 50년이란 세월을 관료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대사헌과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며 영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좌참찬까지 오른다.

선생은 남인의 터전인 상주에서 태어나 퇴계문인 유성룡을 스승으로 섬겼으나 타자를 인정하는 포용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영남 5현을 위해 도남서원을 건립했음은 물론 오윤겸과 정엽을 통해 우율(右栗 우계와 율곡)에 대한 인식을 수정하고 김장생과 더불어 학문을 논하였다.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자 기호학파 송준길을 사위로 맞아 화합의 시초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송준길이 이황을 사모하는 마음을 싹 틔워 정파 및 학파 간 소통의 계기가 됐다.

사후에는 서인 기호학파의 영수였던 사위 송준길에 의해 우복연보가 편찬됐고 그가 지은 행장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시장(諡狀 시호를 청할 때 쓴 글)과 조경이 지은 신도비명에 저본이 됐다.

송시열이 지은 시장은 시호가 내려지는 과정을 담은 행정문서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개령(開寧 경북 김천시 지역)의 덕림서원(德林書院)과 경산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 각각 제향됐다.

조선 고종 때에는 문묘에 배행할 것을 주청한 사림(士林)들의 상소도 3차례 있었다.
▲ 대산루 '공(工)'자 벽


△ 끊임없이 배우고 그 배움을 몸소 실천하다.

우복종택으로 올라가는 길 우측에는 작은 초가집과 커다란 누각이 눈에 띤다.

계정(溪亭)은 그가 40살에 대청 한 칸, 방 한 칸으로 올린 초가집으로 아름다운 산천과 벗 삼아 마음을 닦고 성현의 삶과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던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우곡 20경’의 하나로 ‘청간정(廳澗亭)’으로도 불리는 계정(溪亭)은‘우복학’의 산실이 돼 수많은 저술이 탈고됨은 물론 많은 문인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그는 우복집을 비롯한 아동용 수신 교과서인 양정편과 주자대전의 중요한 부분을 뽑아 엮은 주문작해, 상례참고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류 진과 송준길, 신석번 등 100여 명이 넘는 문인들이 따랐다.



계정(溪亭)

깊은 골짜기 바람과 물 속에 홀로 살아가니

긴긴 해에 계정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네

저녁 무렵에 뜻 나른해 책을 놓고 나가보니

눈 안 가득 신록이라 마당은 온통 푸르다네



우복은 청렴하고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인물이었다.

반평생 벼슬살이 동안 많은 상소를 통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중정한 인사로 세상을 이끌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이 ‘선생은 재상 40년에 들에는 밭이 없고 서울에는 집이 없으며 오직 우복산중에 산수 하나가 있을 뿐이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백성을 생각한 그는 임진왜란 때는 어머니와 아우를 잃는 큰 슬픔을 당하면서도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섰고 전쟁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1599년 뜻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상주시 청리면)을 설립했다.

우복이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썼던 계정 옆에는 그의 서실인 대산루가 있다.

그의 학자적 면모를 그대로 빼닮은 6세손 정종로가 고쳐 지은 건물로 2층에 온돌방을 갖춘 누정은 흔지 않아 주목된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벽에는 ‘공(工)’자가 새겨져 있어 늘 공부에 대한 열정을 담아 학문에 정진하고 배움을 실천했던 ‘우복가문’의 학풍을 엿볼 수 있다.



△ 우복종가가 이 시대에 화두를 던지다.

계정을 지나 비스듬한 언덕을 올라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우복종가에 닿는다.

우복종가는 종택 건물뿐만 아니라 종부의 손길이 닿아 있는 하나하나의 살림살이가 모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열린 대문 사이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우복종택 14대 종부 이준규(1943년)씨가 손님을 맞는다.
▲ 14대 종부 이준규씨

예안 이씨 집성촌에서 2남 5녀 중 맏딸로 태어나 한학에 밝았던 이준규씨는 스무살에 우복종가에 들어왔다.

이른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4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운 종부의 어깨가 종부로서의 삶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15대 종손인 정춘목씨는 상주 시내에서 사업을 하며 종가에 들러 종손 역할을 하고 있다.

종가에는 국불천위인 우복 정경세와 사불천위인 6대손 입재 정종로 등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종택 안에 가묘에 감실을 설치해 정경세의 불천위를, 정침 바깥의 별도 사당에는 정종로의 불천위를 따로 모신다.

정경세의 기일은 음력 6월인데 종손 부부와 종부는 주변 친인척들의 도움을 받아 시절에 맞는 정갈한 음식들을 준비한다.

더운 날씨를 마다하지 않고 종가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봉제사 접빈객을 잊지 않는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가풍은 이어지는 법이다.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학문을 익혀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며 학문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소통하고자 했던 정경세의 리더십은 가문을 이어가는 원동력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는‘우복가문’의 화두인 것이다.


김성대 기자
김성대 기자 sdkim@kyongbuk.com

상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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