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고깔모자(弁) 쓰는 한(韓)인’ 변한(弁韓)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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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자장암 자장스님 진영.
한국인의 역사정체성을 밝히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대부분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신화라고 인정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도 국정교과서에서는 단군개국론을 신화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재야사학자들은 국정교과서의 고대사 서술내용이 잘못되었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급기야는 1981년 국회에서 고대사 청문회가 열려 단군과 고조선의 영토 문제 등을 두고 재야와 강단사학자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 결과 건국신화인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은 인정되었지만, 아직도 단군조선이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합의는 못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은 최근 요임금의 수도로 추정되는 평양(平陽)을 발견했다고 흥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아직도 기원전 24세기경에 단군조선이 세워졌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중국은 산서성양분도사성지(山西襄汾陶寺城址)를 대대적으로 발굴했다. 도사유지(B.C. 2450-1900)를 발굴한 결과 그곳에는 관상대가 있었고, 왕으로 추정되는 수장급의 무덤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는 이곳을 요임금의 수도인 평양으로 추정한다. 요임금을 실존인물로 인정하여 전설시대를 역사화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 아닌가?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건국을 이야기하면서, “단군왕검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 만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요임금이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그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었다면, 단군신화도 사실을 기반으로 한 신화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서 우리는 요임금의 왕성이었던 평양을 고리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미국의 6개 주(州)를 합쳐서 표현하는 뉴잉글랜드는 영국의 잉글랜드의 주민들이 이주해서 만들었다. 그와 같이 이주민에 의해서 지명이 이전한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다면 평양도 그러한 예이지 않을까?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지명 중에는 여러 곳의 평양이 있고, 비슷한 지명인 양평, 요양, 평주 등이 있다.

만약 그러한 가정이 옳다면 단군신화는 더욱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진다.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은 뜻밖에도 선덕여왕 때 활약한 자장승려가 남겼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까지 그렇게 전해오던 이야기이다. ‘삼국유사’탑상편, 황룡사구층탑조를 보자.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는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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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령총 기마인물도 고깔형 모자(弁形帽)를 쓰고 있다.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신라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한 말을 풀어보면, 지금 너희 나라의 국왕은 인도의 찰리(사카)종족의 혈맥을 계승한 사람들이고, 그 이전 그러니까 김씨왕족 이전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동이 공공’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어야 될까?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러한 사실을 전하던 역사책이나 그 밖의 전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에 ‘유기’ 100권을 저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600년 ‘신집’ 5권을 썼다. 백제는 375년에 ‘서기’를 썼으며, 그 밖에도 ‘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 등이 있었다. 신라도 545년에 ‘국사’를 편찬했다. 아쉽게도 삼국시대에 쓰인 이들 역사책은 한 권도 남아있지 않다.

자장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역사책과 전적들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을 볼 시간도 충분했다. 자장이 중국에 유학을 떠난 시점도 비교적 늦은 나이인 47세 때다. 이미 국내에서 많은 공부를 한 상황이었다. 그런 자장이 유학을 가자마자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7일간 기도했고, 그 기도에 문수보살이 감응해서 위에 인용한 말을 전했다. 그것은 자장 자신에 내면화된 정보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내용은 신라를 주도한 그룹은 크게 보아 두 그룹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김씨왕족이고, 둘은 김씨가 주도하기 이전 세력인 동이공공의 후예라는 것이다. 아마도 진한을 주도했던 박혁거세 집단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그런데 ‘구당서’와‘신당서’도 신라를 주도한 그룹이 둘이라고 전한다. 엄격히 말하면 둘이라고 했다기보다는 신라의 김씨 세력과 그 이전 세력이 다르다고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신라국은 본디 변한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라고 기록했다. 그것은 이전의 중국사서인 ‘삼국지’에서 ‘신라를 진한’으로 인식한 것과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구당서’와 ‘신당서’는 김씨왕족이 주도하던 신라를 변한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당황할 것이다. 신라가 변한의 후예라고!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분명히 진한이 신라가 되었다고 배웠는데…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 정체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라는 변한의 후예’라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주장을 제대로 해명한 글을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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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 관모 재현, 고깔형태의 관모다(弁韓).
사실 변한이라는 이름은 문화사적인 입장에서 해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변한이라는 말은 ‘고깔모자[弁]를 쓰는 한(韓)인’이라는 말이다. 신라의 왕이나 귀족들이 썼던 모자를 보면 그들은 대부분 고깔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고총고분 시기의 유물인 토우들도 대부분 고깔모자를 쓴 형상이다. 그들은 왜 그런 모자를 썼을까? 그것은 그들 조상들이 그러한 복식을 즐겨 했기 때문이다. 바로 천산주변에 살던 사카족의 풍습이 그랬다. 사카족의 복식 중에 주변에 살던 종족과 가장 눈에 띄게 다른 것이 바로 고깔모자였다. 그것은 천산주변이나 페르시아에 있는 암각화에서도 증명되고,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다. 문헌도 ‘사카족은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너희 국왕은 찰리종족인 사카족과 관련 있다고 한 말은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요즘은 신라 김씨왕족이 흉노계열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카족은 흉노의 우현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이공공’은 누구인가? 동이족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안다. 상고시대에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공공은 누구인가? 그들은 요임금과 동시대에도 살았다. 그것도 최근 중국에서 발굴한 도사유지, 그러니까 평양에 함께 살았다. ‘서경’이나 ‘사기’를 비롯한 많은 문헌에 그들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다.

‘사기’를 보자.

“삼묘가 강회, 형주에서 여러 차례 난을 일으켰다. 이때 순은 순수를 마치고 돌아와 요에게 공공을 유릉(幽陵)으로 유배시키어 북적을 교화하게 하며, 삼묘를 삼위산으로 쫓아내어 서융을 교화하게 하며, 곤을 멀리 우산으로 추방하여 동이를 교화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들 네 죄인을 징벌하니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

‘사기’에 등장하는 공공은 분명 요임금 때 평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사기의 전문을 보면 공공은 순보다 먼저 요의 후계자로 천거되었었다. 그런 그가 요임금 말년에 유릉인 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축출되었다. 북경에서 북쪽으로 65km 정도에 있는 밀운현(密雲縣)에 가면 공공성유지가 있다. 북경대학역사학계에서 발굴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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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운남성으로 내려간 사카족의 유물, 고깔형태의 수목형 모자를 쓰고 있다. 신라 금관의 조형(祖形)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장이 전한 정보를 가지고 단군신화를 해석하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요임금 말년에 단군조선이 세워졌다는 것과 공공이 유릉으로 이주한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단군조선이 수도를 평양으로 한 것은 단군조선을 세운 주도세력이 요임금의 수도인 평양에서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군조선은 요임금 말년인 기원전 2333년경에 세워진 것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아진다.

정리해 보자. 1000년 왕국 신라를 이끈 두 집단은 단군조선의 후예인 박씨집단과 천산주변에 살던 유목민족인 사카족의 후예인 김씨왕족이었던 것이다. 특히 박씨집단은 단군왕검조선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를 보면 환웅은 곰족과 호랑이 족이 사는 곳으로 이주해 왔다. 그러니까 공공을 환웅세력으로 보면 그들이 요서지역의 곰부족과 연합하여 단군왕검조선을 열었고, 그들이 역사적 파동으로 인하여 동으로 이동해서 한반도로 들어왔고, 종국에는 반도의 동남쪽 서라벌에 터전을 잡고 사로국을 열었던 것이다. 신라는 단군왕검조선의 맥을 계승한 종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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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형진 원장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

문경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한국 고대사와 고대 종교문화를 연구. 장기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주도한 지배 종족에 관한 연구서를 출간했다. 현재는 남북통일 후 역사정체성 통합 문제와 유라시아 문명사의 관점으로 풍류도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가을에 ‘단군, 만주에서 열도까지’를 출판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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