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정체성의 밑바탕 된 '천년역사 신라의 정신'

서로 다른 나라였던 삼국을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하여 오늘날 한국의 정체성을 만든 신라. 신라는 삼국 중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외졌고, 문화적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며, 국토 넓이도 가장 작았다. 어떻게 한반도 동쪽 작은 6촌의 땅 서라벌에서 미약하게 시작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뚜렷하게 세계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 부흥의 비밀과 관련해 개방성과, 진취성 등 독특한 정체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개방성과 진취성, 도전성은 신라 정신의 진수”라고 하다.

골품제의 신분 제약을 넘어 청해진 개척으로 해상왕이 된 장보고의 도전 정신, 고구려와 백제의 이주민은 물론 인도와 페르시아 등 이주민들에 대한 수용과 개방성, 군주의 전횡을 막고자 한 화백(和白)회의, 지배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모두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신라정신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왕족 김흠운이 전투에 나가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했으면 사람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한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구하겠는가”라며 죽음을 맞이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황룡사 9층목탑, 불국사 다보탑 등 대형 건축 프로젝트에 다른 나라 기술자들까지 데려오는 유연성도 뛰어났다.

다음은 김춘추(무열왕), 김유신, 사다함, 관창 등 통일의 밑거름이 된 숱한 인재를 배출했고, 통일의 원동력 역할을 한 화랑정신이다. 임전무퇴와 충효 정신이 그것이었다.

삼국통일(676년)을 하기까지는 전쟁의 연속이었고, 그때 마다 화랑의 활약은 눈부셨다.

고조선 멸망 이후 진, 삼한, 옥저, 예(濊), 가야, 부여 등 열국(列國)의 시대를 지나 삼국시대로 정립되면서 고구려 백제와 거의 상시 전쟁을 치러야 했던 신라였다. 4세기 때 삼국간 54회였던 전쟁은 5C. 60회, 6C. 50차례, 7C.에는 무려 150차례에 이르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대구교대 윤리교육과 성장환교수는 삼국통일과 신라의 번영은 풍류정신과 화랑도(花郞徒)라는 다른 국가들과의 우위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존재했던 삼국시대에 가장 국력이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사상을 포괄한 풍류정신과, 이 풍류정신으로 무장한 화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특별히 화랑도만은 양반출신 청소년뿐만 아니라 서민출신 청소년에게도 개방됐다. 이러한 개방성과 유불도 사상을 인정했던 포용성 등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아주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북의 정체성을 찾는 방안의 하나는, 신라의 개방성 그리고 포용성을 음미해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화랑도의 중심계율은 세속오계(世俗五戒)였다.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에 의해 현 경북 청도군 신원리 일대 가슬갑사라는 절에서 탄생했다.

원광은 가슬갑사에 머물며 신라 청년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했다. 임전무퇴, 살생유택 등 오계는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빛을 발했다. 귀산과 추항이 임전무퇴를 실천, 전사하면서 화랑들의 영원히 살아있는 정신이 됐다.

유학과 불교, 도교 등 삼교를 모두 수용하는 신라 고유의 현묘한 도란 뜻의 현묘지도((玄妙之道)인 풍류도(風流道)는 화랑에게서 구체화됐다고 한다. 화랑들이 풍류도를 갖춘 인재들이었다고 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백~수천 명의 낭도를 거느린 화랑은 신라 통일의 최첨병이었다.

400여 년간 200여 명의 화랑이 배출됐고 이들은 신라 통일과 신라 조정의 기둥이었다. 화랑들은 10대 어린 시절부터 무리지어 다니며 심신을 수양하고 풍류도를 익혔고 세속오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계율로 잊지 않았다.

전국에서 화랑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경북이다. 전국 화랑관련 문화생태자원 56군데 중 경주 영천 경산 청도 4개지역 경우 27군데로 전체의 절반(48.2%)이다.

경북도와 4개 시’군은 수년전부터 3천 억 원을 들여 이 4곳을 잇는 ‘신화랑’풍류체험벨트’를 조성키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화랑도는 최근들어 2004년엔 강원도 속초에 ‘영랑호 화랑도체험관광지’가, 충북 진천에서는 2002년 ‘생거진천 화랑촌’으로 거듭나고 있다. 화랑도는 21세기 한국정신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 정복 후 신라마저 삼키려 했던 당(唐)나라의 꿈은 철저히 실패했다. 귀국한 소정방에게 “왜 신라를 치지 못했느냐”며 당나라 왕의 추궁을 받자 소정방은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가 충성으로써 국가를 떠받들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섬기되 그 부형같이 하고 있으니 비록 작은 나라라 하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개방성과 진취성, 이주민들에 대한 수용력 등 문화의 다양성에 있어 많은 장점을 가진 신라정신은 국가 인재양성 시스템인 화랑도와 함께 신라 부흥의 원천이었다. 신라정신은 남북통일과 선진국으로 국운을 개척하려는 한국이 배워야 할 정신으로 필요한 가치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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