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갈피마다 충절 있는 인물 배출한 문향의 고장

포항시 최남단에 위치한 장기면은 100.17㎢에 이르는 면적으로 남구 읍면동 중에서 가장 넓다. 

남으로는 경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북으로는 구룡포읍, 오천읍, 동해면과 맞닿아 있으며, 14.5㎞에 이르는 동해 바다를 끼고 있다.

1990년대에는 1만명 이상이 살았으나 지금은 그 절반 수준인 4천700여명이 거주한다.

23개 법정리와 89개 자연부락이 있는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으로 ‘오지마을’로 꼽히지만 오랜 역사의 갈피마다 그 이름을 빠트린 적이 없다.

지난 2천년에는 산서리에서 긁개, 찌르개 등 대구·경북지역에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문 후기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일찌감치 민족사를 열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이 곳은 신라 초기부터 이두문자로 ‘물이 끓어오르는 고을’이란 의미의 ‘지답현只沓縣’으로 불리며 주변 일대를 관장했다.

통일신라 때 기립현(鬐立縣)으로 바뀌는데, 동해바다를 끼고 있는 이 지역 곶串의 모습이 말 갈기가 서立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고려 때인 서기 930년, ‘긴 말 갈기’란 뜻의 장기(長鬐)로 고쳐진 후 오늘에 이른다.

▲ 장기읍성 전경. 장기면 제공.
△왜구에 맞선 해안 전초기지

신라는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서라벌로 침공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해안에 산성을 쌓고 이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장기는 전략적 요충지로 많은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장기 구읍성, 시령산성, 만리산성 등이 이 때 축성된 것들이다.

이후 동악산 능선을 끼고 동해안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장기읍성이 들어서고, 비슷한 시기에 뇌성산성과 봉수대도 들어선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경상도읍지’는 장기지역에 뇌성산, 대곶, 장곡, 사지, 복길, 발산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수의 봉수대가 장기의 중요도를 짐작케 하거니와 내륙으로 침략 사실을 전파하는 망루이자 적의 속도를 늦추는 전진기지였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세종 대에 이르러 오늘날 모포리에 해당하는 포이포(包伊浦)에 진이 설치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그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거니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직전에 첩자를 보내 염탐한 자료에는 ‘포이포진에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장졸 217명, 군량미 532석이 있고 동래로부터 수로로 270리, 육로 305리’라고 세세하게 기술돼 장기의 군사적 위상을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방어기지에서 배태된 ‘항일’과 애향심은 임진왜란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도 면면히 이어져 숱한 의병과 독립투사를 낳는다.

장기향교 전경. 이상준 제공.
△12개 서원의 마을


장기는 또한 문향의 고장이다.

김광수 장기충효관장은 “장기는 서원이 많은 예향의 고장으로 대대로 빼어난 학자가 많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장기지역에는 죽림서원을 비롯해 광남서원, 덕림서원, 학삼서원, 서산서원, 삼명서원, 금산서원, 안산서원, 중양서원, 봉덕서원, 나곡서원, 수성서원 등 현(縣) 단위로는 상당한 숫자인 12개의 서원이 있었다.

여기에 향교가 더해진다.

명륜당과 대성전의 축을 병렬로 하고 대성전을 뒤에 배치시킨 좌학우묘 형식의 장기향교는 유교이념 전파와 교육, 제사를 담당하면서 유학을 꽃피웠다.

일종의 사립학교인 서원과 국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어우러지면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유향의 고장으로 거듭난다.

이는 유배지였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장기읍성 전경. 장기면 제공.
장기초등학교에는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과 대표적 남인인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두 개의 사적비가 사이좋게 서 있다.

후손들이 장기를 거쳐 간 두 석학의 자취를 더듬어 근래에 세운 비다.

당대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우암은 숙종 원년(1675) 장기로 유배되어 5년간 머무른다.

장기 출신인 이민홍 전 성균관대 교수는 “우암이 거주한 사오년 동안 장기고을은 보잘 것 없던 황량한 변방의 범속한 풍속이 바뀌어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현의 고을이 되었다”고 평했다.

다산은 우암보다 120여 년 후인 순조 1년(1801) 장기와 연을 맺는다.

다시 강진으로 보내지기 전까지 일곱 달 남짓 체류했지만 다산은 첫 유배지인 장기에서 130여수에 이르는 한시와 기해방례변 등의 저술을 남기며 불후의 저작들을 예비했다.

이에 앞서 여말선초부터 장기에는 대사간, 대사헌, 영의정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과 학자들이 유배됐다.

이들의 흔적은 여전히 정신적 ‘유적’으로 남아 장기가 배출하는 숱한 학자와 관료의 원형질이 되고 있다.

고려 충신 이귀춘과 임란 때 의병장 이대임을 배향한 학삼서원 전경. 이상준 제공.
△충과 절의 고을, 쏟아지는 인재들 

지금의 산서리 중심마을인 서화실에는 일평생 선녀를 그리며 마을 곳곳에 꽃나무를 심은 농군 설화가 전해진다.

그가 죽고 난 후 상서로운 매화꽃이 피어 올곧은 사람과 걸출한 인물, 돈 잘 버는 사람들이 수없이 나왔다는 이 설화와 비슷한 얘기가 장기 곳곳에 서려있다.

해안 방어기지에서 잉태된 충과 절은 걸출한 의병장과 장군을 낳았고, 유배지에서 유현의 고을로 환골탈태한 후에는 이름 높은 학자와 많은 위정자를 배출했다.

근 100여년 사이에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이름들을 장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을사조약 후 장기의진을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장헌문 의병장이 이 곳 출신이며, 대종교를 봉교하며 청산리 전투 등에 참여한 애국지사 엄주동 선생도 장기에서 출생했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 멤버로 공군사상 첫 4성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김성룡 장군의 고향도 이곳이다.

학삼서원 현판은 백범 김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상준 제공.
해방 후 알려진 국가고시 합격자만 22명에 달해 “장기가서 공부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기 출신 엘리트는 정·관·학 등에 두루 포진해 있다.

먼저 정·관계에는 임채주 전 국세청장, 손정 전 총무처 소청심사위원, 강만철 초대 경북도의원, 이상천 전 경북도의장, 고 오철상 초대 영일군의회 의장, 강한국·김천수 전 포항시의원, 서종원 전 대구세무서장, 최상만 전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이사관, 엄항섭 전 점촌·문경시장과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명재 국회의원과 이강덕 포항시장, 이정호 경북도의원, 정석준 포항시의원, 이기권 포항 남구청장, 정봉영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 창조혁신국장, 오중기 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 위원장, 허대만 더불어민주당 포항 남·울릉 위원장이 장기면 출신이다.

학계에는 의사이기도 했던 서석주 전 장기중 재단이사장, 정범영 전 평택교육청 교육장, 김병관 향산교육재단 이사장, 서정건 초대 장기고등공민학교장, 이남구 전 경북대 교수, 이민홍 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김영삼 전 인천대 교수, 고 장상호 단국대 총장과 그의 선친인 고 장도수 전 영일중 교장, 허우원 전 부산경상대 교수, 정주영 전 포항중앙고·중앙여고 초대교장, 김동훈 전 경주교육청 교육장, 박시영 전 포항초 교장, 임충자 전 서울중동초 교장, 허상수 전 포항중앙고 교장, 성홍근 전 포항1대학 교수, 김원철 전 선린대 교수, 이종길 동아대 교수, 정헌영 부산대 교수, 전태열 건국대 교수가 있으며 법조계에는 고 서정순 판사, 임채홍 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김영진 전 인천지방법원 판사, 손원락 서울서부지방 판사가 있다.

재계 인사로는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고 김찬두 두원그룹 회장, 서석구 ㈜세진 회장, 안경선 동아화학공업사 대표이사, 이남석 ㈜동광화학·㈜동광화성 회장, 이무형 전 포항상공회의소 회장, 김병원 ㈜금보령 대표, 허상호 삼도주택 대표, 김택득 전 코스넷정보통신 회장이 장기인이다.

장기충효관 전경. 이상준 제공.
이와 함께 오주의 전 육군본부 감찰차감, 임구호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경희대 교수를 역임한 고 금인석 서예가, 한국서예작품협회 심사위원을 지낸 이봉학 서예가, 향토사학가 이상준, 1986년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정명옥 등 사회·문화·체육계 인사도 두루 배출됐다.

이들 장기 출신 인사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장기 사람들은 지난 1997년 면 단위로는 드물게 지역발전 협의체인 ‘장기발전연구회’를 발족하고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 건립을 추진하는 한편 2004년 장기충효관을 지어 장헌문 의병의 훈장과 김성룡 장군의 전투복 등 실제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지금도 1년에 2차례 이상 총회를 여는 장기발전연구회는 최근 엄주동 애국지사 추모비를 건립하며 이곳 사람들의 충절을 스스로 기리는 한편 유무형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진제공 = 장기면, 이상준 저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
※도움주신 분 = 금낙두 장기충효관 운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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