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맥 꽃피운 ‘영남의 소퇴계’ 대산 이상정

▲ 대산종택

대산 이상정(1711-1781)은 한평생 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흔히 대산 이상정을 퇴계 학맥을 이은 대학자라고 부른다. 그의 별칭이 ‘소퇴계’인 것을 보면 일찍이 그의 학문은 근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앙에까지 두루 미치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퇴계 학맥의 연원과 정맥을 이어받아 꽃피운 것에 비해 인식은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남긴다. 영남학맥에서 대산만큼 학문이 깊은 사람도 드물었다.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에 올려 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안동 일직 망호리 출신의 이상정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목은 이색의 15대 후손이다.

대산은 당시 영남 남인 학계의 거두 밀암 이재의 외손자로서 문명이 높았으며 밀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적전을 계승한 대학자이다. 대산을 지칭할 때 ‘소퇴계(小退溪)’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산 이상정이 남긴 저술만 보더라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다. 대산의 일차 저작물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 27책 분량. 거개가 두세 책 정도 남긴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성취다. 52권 27책에 모두 2천157판에 달하는 양이다.

25세에 대과에 합격한 대산은 여러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소호리 마을 뒷산 대석산 기슭에 ‘대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이때 부터 대산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실제 대산의 관직생활은 급제 이후 45년 동안 6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정치적 탓도 있지만 퇴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대산의 문하에는 ‘호문삼종’으로 불리던 동암 류장원, 후산 이종수, 천사 김종덕 등 뛰어난 학자들이 줄줄이 배출됐다.

그의 학문 여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계기는 57세 때(영조43) 고산정사(高山精舍)를 지은 것이다. 안동시 일직면 광음리에 위치한 정사 앞으로는 붉은 석벽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그 사이로 ‘미천’이란 시냇물이 흘러간다. 그는 이 풍광을 고산잡영(高山雜詠)으로 노래했다.

대산은 70세(정조4)에 이르러 정3품 당상관인 예조참의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해인 3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했다. 그해 6월 ‘9조소’를 올린 뒤 12월 9일 세상을 하직했다.

세상을 떠나면서 올린 9조소에는 대산의 평생 학문이 이 한 편의 글에 응축돼 있다.

입지(立志), 이치를 밝히는 일(明理), 거경(居敬), 하늘을 본받기(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기(納諫), 학교를 일으키기(興學), 사람 부리기(用人), 백성 사랑하기(愛民), 검소하기(尙儉) 9조소의 항목이다. 대산은 이 9개 항목이 모두 덕을 연마하고 본심을 기르는 요점이고 정치를 잘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정조는 “좌우명으로 바꾸어놓고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겠다”고 다짐하고 대산을 크게 등용할 의사를 가졌으나, 이미 대산이 세상을 뜬 후였다.

대산은 사후 35년이 흐른 순조16년에 이르러 이조참판 직에 증직되었고, 또 이후 67년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또 그 28년 뒤에야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호를 받은 해는 순조4년(1910)의 일로 조선 왕조가 그 종막을 고할 때였다.

고산서원

지방 사림은 문경공 대산 이상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정조13)에 ‘고산서원’을 건립했다. 서원의 터는 1768년(영조44)에 창건된 고산정사에다 지었다. 당시 고산정사는 초가삼간, 대산 선생의 유흔이 남아 있었다.
고산정사

이후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이후에는 향사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했다. 1985년부터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인 이광정(李光靖)을 배향했다. 이후,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5년 10월 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됐다.

이방수 종손

대산 이상정의 9대 종손 이방수 씨(66)와 종부 박정순(63) 씨는 일직면 대산종택에서 가학 계승과 보종에 힘쓰고 있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대종택으로 돌아온 지도 10여 년째다.

종손은 집안 대대로 지켜나가야 할 유훈이라며 ‘家範’이라는 책을 펼친다. “후학 정진을 도와라, 항상 마음을 바로 하고 세상 유혹에 빠지지 마라. 유가의 유품을 잃지 마라(…)” 종손은 보종(保宗)을 위해 전통에 대한 학습과 세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차)손 모임인 ‘보인회’,‘영종회’모임에는 적극 참여한다. 대구에 있을 때 안동청년유도회 활동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안에 한학자 1명쯤은 있었으면 좋겠어요. 선조들의 가학을 충실히 이어가는 것 또한 효행 아니겠어요” 종손 역시 자신의 아들이 하루 빨리 대를 이어 가학을 계승했으면 하는 내심을 내비쳤다.

이방수 종손은 “종택이 있는 마을 중앙에 최근 중앙선 철도가 이설돼 혹 조상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며 마을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가범
대산종택
고산서원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