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답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땅에 사는 사람"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 전경.

승지(勝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1차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십승지(十勝地)’에 대해서 들었던데서 기인한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자 복을 주는 길지(吉地)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풍수전문가 최어중(崔於中) 씨는 ‘정감록’에 따라 전국의 십승지를 답사해보고 99년 ‘십승지풍수기행’을 펴냈다. 자기 조국의 땅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평가할지는 몰라도 유럽을 비롯해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다도 한국 땅 만큼 살고 싶은 정겨운 땅을 드물었다. 도회지에서 경제활동을 마친 이후에는 좋은 땅을 찾아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리라는 꿈을 갖고 꾸준히 전국을 여행 삼아 다니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건축물을 지을 때는 대부분 풍수전문가가 조언을 한다. 역사적으로 최고의 풍수적 건축물은 신라 수도 서라벌 황룡사 9층 목탑. 신라의 상징물이자 풍수적 개념이 가미된 걸작이다.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까지 데려와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 목탑이 세워진지 10년 만에 김추추가 왕위에 올라 삼한일통의 대업이 시작된다.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 (신동아 제655호)이 기(氣)풍수 전문가로 알려진 지한 선생에게 얻은 설명이다.

“황룡사 9층탑의 천기는 워낙 강력해 사람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기운의 정체를 파악해낸 뒤 무덤 쪽으로 기운을 옮기고 무덤에 서려 있는 지기와 함께 중화시킨 뒤 산 사람에게 사용하려 한 듯 보입니다.”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기준은 풍수다. 풍수라는 개념은 흔히 바람을 갈무리하고(藏風), 물을 얻는(得水) 곳, 즉 명당을 찾아내는 논리적 체계다. 겨울철 서북풍의 거센 바람 등을 피할 수 있으며, 지기(地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작동하는 물을 만나는 곳이 대개 좋은 터라는 것.

전문가들에 따르면 풍수학의 고전 ‘장서(금낭경)’라는 책이 있다. 동양의 풍수학자들이 풍수의 바이블로 인정하는 책이다. 이 책은 풍수의 핵심이 ‘기(氣)’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풍수란 생기(生氣)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葬者 乘生氣也). 땅속에 흐르는 생기는 다른 표현으로 지기(地氣)라고도 하며, 이 지기를 ‘타기’ 위해 풍(風)과 수(水)의 역할이 강조된다. 우리 고유의 풍수는 바람을 하늘의 기운(天氣)으로 보고, 물 역시 하나의 기운 덩어리(水精)로 취급한다. 즉, 지기는 천기를 만나 갈무리되거나 수정의 기운을 얻어야 비로소 명당이 되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고인돌, 평지에 세워진 신라 고분, 비탈진 돌벼락에 세워진 암자 등은 지기와 함께 천기, 혹은 수정 기운이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운이 눈에 보이거나 이론적 틀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비과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십승지의 원조는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견주어 조선 최고의 예언자라 불리는 남사고(南師古·1509∼1571)다. 호는 격암(格菴)이다. 역학·풍수·천문·복서(卜筮)·관상 등에 도통해 대예언가 소리를 듣게 됐다. 오늘날에도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란 비결 책을 격암이 쓴 것으로 믿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판 유토피아 십승지를 말했지만 우선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를 주목했다. ‘정감록’의 십승지 외에도 ‘남사고비결’ ‘격암유록’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토정가장결’ ‘택리지’ ‘두사충비결’ ‘피장처’ 등 저마다 승지를 지목한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 길지를 구하고 있다.

공주 유구읍 동해리 전경
그럼 십승지는 어디인가. 격암 남사고가 가장 뚜렷하게 정감록 십승지를 표현했다. 정감록과 남사고의 십승지는 대부분 겹친다.

정감록 전문가인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은 풍기(豊基) 금계촌(金鷄村), 예천(醴泉) 금당실, 동(安東) 화곡(華谷), 개령(開寧)의 용궁(龍宮), 가야(伽倻) 남쪽 만수동(萬壽洞), 봉화(奉化), 태백산, 지리산, 단춘(丹春), 공주(公州) 마곡(麻谷), 진천(鎭川)의 목천(木川),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을 소개한다.

엣날 선인들이나 풍수서에서는 대부분 십승지의 으뜸으로 풍기(豊基) 금계촌(金鷄村)과 예천(醴泉) 금당실을 꼽는데 일치한다. 충남 공주에 사는 이희성 풍수지리가도 동의한다. 그는 셋번째 십승지로 공주 유구·마곡을 얘기한다.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사곡면 우남리(생골, 생양동), 신풍면 화흥리 물안마을이라고 한다.

고창 반암마을
전북 전주대 평생대학 풍수지리 김상휘 주임교수는 첫째를 예천 금당실 마을, 그 다음으로 고창의 반암마을, 세 번째로 유구읍 마곡을 꼽았다. 김 교수는 “승지는 피난처 은둔 재기의 땅으로 분류된다. 금계포란형인 금당실은 서울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서울에 가까운 거리로 피난처, 은둔, 재기(再起) 세 가지를 모두 갖춘 길지중의 길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당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기(天氣, 일종의 에너지라 치자)가 주위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마을을 돌면 그 청량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진다. 김 교수는 지금 풍수소설 ‘왕의 자리’를 내년 출간을 목표로 집필중이다.

비결서에서 가리키는 승지를 현대의 눈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어디가 십승지, 즉 좋은 땅일까.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은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본다.

사람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탐구기사가 넘쳐난다. 남의 나라 사람은커녕 비선실세 논란을 빚어낸 장본인인 박근혜 대통령도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른다. 인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인공지능(AI) 알파고까지 나오는 과학기술 시대이지만 확실한 게 하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그러나 땅은 사람보다 정직하다고 풍수가들은 본다.

땅과 사람이 빚어내는 재난(災難), 병(病), 경제공황이라는 현대판 삼재(三災)는 가장 경계하지만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시대를 일러 난세(亂世)라 한다. 그 공간을 탐색하고 발견하기 위한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를 찾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었다. 후일 보정(補正)이 필요하다.

그동안 전통적인 십승지 외에도 여러 곳을 소개했다. 정신적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도시인들을 위해 힐링처(healing處)로 눈여겨 볼만한 땅이다. 생태와 생명의 땅을 찾아 인생 반전(反轉)을 노리는 사람들이 개척지로 삼거나 최소한 마음속에 두고 가끔은 찾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영국의 존 오키프 교수는 ‘장소세포(place cell)’를 발견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생쥐도 장소마다 다른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지도처럼 뇌 속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어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장소와의 함수관계는 훨씬 심오하고 신비로울 것이다.

하버드대 행복학 명강의로 유명한 <해피어>의 저자인 탈벤 샤하르는 “행복은 외부의 물질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승지를 찾아 살아도 승지를 승지답게 하는 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이고, 아무리 부족한 곳에 살아도 그 땅에 사는 사람이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천 금당실마을 전경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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