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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는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다. 그 시대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와 미국의 독립투사 토머스 페인은 현자(賢者)였다. 둘은 프랑스 혁명을 두고 반응이 달랐다. 1789년 버크는 프랑스혁명 ‘인권 선언’에 대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요약본”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한 반면 페인은 “유럽에서 일어날 다른 혁명들의 전조”라며 역사의 진보라는 입장이었다.

그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인파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그들은 헌법 제1조 2항에 박힌 이 나라의 주권자다. 당연히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후 오늘의 대한민국도 프랑스혁명 때와 유사하다. 촛불민심을 두고 ‘자유’라고 보는 이도 있고, ‘혼란’과 ‘광기’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중구난방일 수도 있다.

문제는 한 달 이상 국정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 제대로 심사하지 않은 400조원의 내년도 예산안이 법정 기한을 나흘 앞두고 졸속처리 될 운명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거부하며 북한 핵과 대미(對美) 외교를 손 놓고 있다. 야당은 내년도 정권 장악이라는 콩밭에 가 있다. 모두 문제 해결능력이 없고 비전과 대안이 없으니 답답한 현실이다. 박 대통령은 이 사태에 대해 국민에게 무릎 꿇고 사실을 말해야 한다. 가슴을 치며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아무 소리 못하고 지배받던 유신과 5공의 독재 정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국수습책을 낼 만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여론만 살펴도 된다. 사명(使命)의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간신배에 둘러싸인 이 정권의 여론 수렴능력은 민주정부 30년 역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이미 16세기에 여론정치를 말했다. “ ‘공론(公論)’이 조정(朝廷)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공론이 항간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만약 위아래 모두 공론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지금 공론은 거리에 나뒹굴고 거리 뒤의 골목 사랑방에 있으니, 이거야말로 난국(亂國)이 아닌가.

한시바삐 박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는 촛불민심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탄핵과 사임(하야)이 최선인가 라는 물음에 누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나?. 박 대통령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회가 뽑은 책임총리에게 행정권을 넘기고 진퇴를 포함한 정치일정을 제시하라. 박 대통령과 야권의 타협만이 정국수습으로 질서와 진보를 동시에 이뤄내는 최선의 해법이다. 책임총리가 이끄는 과도내각은 대한민국 최초의 정권교체요 최초의 민주정부인 제2공화국을 연 허정내각 모델이다. 국정조사와 특검결과에 따라 조기사임도 가능하다. 얼마 전 박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를 국무총리로 내정했다. 지금은 야당이 책임총리를 안 받으려고 하고, 박 대통령은 책임총리를 임명할 의사가 없다. 그러면 죽어나가는 것은 이 나라의 경제요 민생이다.

2014년 ‘비선 국정개입 의혹’이 어른거릴 때 본지는 적실성 있는 행정학자로 유명한 김병준 교수와의 인터뷰를 신년대담(2015년 1월 14일자)으로 내보냈다. 공론을 정확히 파악한 현자에게 현책(賢策)을 묻기 위해서였다. “지금 청와대는 시스템 자체가 안 됐어요. 대통령이 일을 직접 챙기면 안돼요.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면 옆에 있는 심부름꾼이 힘이 생기는 거에요.” 그 심부름꾼이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을 통한 최순실이다. 오늘날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예견력이 새삼 놀랍다. 그는 국정운영 시스템을 강조했다. 국가 개조, 국가혁신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시스템은 한 마디로 제도다.

현 제6공화국 30년 체제를 매듭짓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제도(선거 정당 헌법)를 도출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믿을만한 정치세력도 없다. 결국 대한민국의 힘은 우리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라도 현명하는 수밖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김정모 서울취재 본부장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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